유라시아대장정

버마 이해하기

2014. 2. 23. 19:34 - 유라시아대장정



1. 공식 국명   


파고다의 나라, 황금의 나라로 알려져 있는 미얀마는 세계인들에게는 아직도 버마 또는 미얀마로 귀에 익은 나라이다. 우리에게는 1983년 10월 9일 우리나라 각료 17명이 북한 정찰국 특공대 소속 비밀요원인 진모 소좌, 김민철 상위, 신기철 상위 등에 의해 저질러진 폭탄 테러로 사망한 아웅상(Aun Hsan ; 1915-1947) 묘소 폭파 사건을 통하여 널리 알려지기도 하였는데, 1988년 아웅상의 딸 아웅상 쑤찌(Aun Hsan Su Kyi ; 1945-현재) 여사가 주도했던 민주 항쟁이 실패로 끝나자, 정권을 잡은 SLORC(State Law and Order Restoration Council)라고 일컫는 신군부 정권인 국가법질서회복평의회에 의하여 1989년 6월 버마사회주의연방공화국(the Socialist Republic of the Union of Burma)에서 미얀마연방(the Union of Myanmar)으로 국가의 공식 명칭이 바뀌었다. 이는 전자가 약 68%를 차지하는 다수민족인 버마족만을 가리키는 것에 반하여, 후자는 소수민족도 포함한 전국민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미얀마는 하나라는 단결과 화합의 목적이 그 개명의 핵심적인 이유였다.  옛 수도인 랭군(Rangon)의 이름도 양곤(Yangon)으로 바꾼 바 있다.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유엔과 동남아시아국가연합 소속의 국가들은 바뀐 국명을 인정했지만 미국은 미얀마라는 국명 사용을 거부했고, 유엔은 ‘버마/미얀마’라는 표기를 사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한 당시 국명과 수도 이름 등을 바꾸기 위해 만들어진 위원회의 위원 21명 가운데 4명만이 학자들이었고 나머지는 군인들과 관료들이었다고 전했다. 다음해인 1990년 총선에서 수치 여사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이 압승을 거뒀지만 군부는 정권 이양을 거부했고 2011년 민선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버마를 통치해 왔다. 사실 군부가 미얀마라는 이름을 임의로 국가 명칭으로 사용하기 전까지 버마와 미얀마는 현지인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는 용어였다. 보통 구어에서, 즉 일상적인 대화에서는 버마로, 문어에서는 미얀마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치 여사와 민족민주동맹을 비롯한 민주화세력이 미얀마라는 이름을 거부하는 것도 용어 자체보다는 군부가 정당성 없이 붙인 이름을 거부하겠다는 뜻에서다.  군사 정권은 SLORC라는 국가법질서회복평의회를 1997년 11월 SPDC(State Peace and Development Council)라는 국가평화개발평의회로 군사 정부의 명칭을 바꾸었다.  


2. 민족      


민족의 모자이크라고 불리는 동남아시아 가운데에서도 미얀마는 유달리 민족 구성이 다양한 국가이다. 미얀마에 사람이 처음으로 정착해 산 곳은 약 1만 1,000년 전 이라와디 강 중류유역으로 추측되고 있다. 대략 BC 100∼AD 800년경 피우족으로 알려진 일단의 티베트미얀마어계 민족이 이라와디 강 상류유역에 나타났다. 남쪽에는 몬족(族)으로 알려진 오스트로아시아어족(語族)에 속하는 민족이 시탕 강 유역에 정착해 타톤에 항구 수도를 세웠다. 수도를 프롬(피에)에 정하고 번영을 누렸던 피우국(國)과 마찬가지로 몬족이 세운 나라도 번영을 누렸다. 9세기 피우의 수도는 중국 남조(南朝)의 타이산에게로 넘어갔다. 피우에게 지배를 받던 미얀마인들은 티베트미얀마어계 여러 민족들을 장악하고 파간을 그들의 수도로 정했다.1044년 파간에서 아나우라타가 왕좌에 올라 몇 년 동안에 미얀마 전체를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하고 최초의 미얀마 제국을 수립했으나 1287년 몽골족의 침략을 받아 무너지고 말았다. 16세기 퉁구 왕조 치하에서 최초로 재통일이 이루어져 1752년까지 단속적으로 계속되었으나 곧이어 다시 몬족의 버마 지배가 시작되었다. 버마의 저항세력은 민중지도자 알라웅파야를 중심으로 다시 모였으며, 1759년에는 마침내 버마 전역을 확보하고 버마 최후의 왕조를 건설했다. 알라웅파야 왕국은 인접 국가들을 놀라게 할 만한 팽창정책들을 펼쳐 나갔다. 특히 아삼 지방에 대한 미얀마의 야심은 영국과 충돌한 계기가 되었다. 버마는 아삼 지방을 점령했으나 2번에 걸친 영국-버마 전쟁(1824∼26, 1852)으로 아삼 지방뿐만 아니라 마니푸르·아라칸·테나세림과 페구까지 잃고 말았다. 이어 버마의 나머지 지역은 제3차 영국-버마 전쟁이 끝나면서 1885년 영국으로 넘어갔다. 영국의 지배 아래에서 버마는 인도의 일개 주(州)로 전락했다. 영국은 불교를 국교로 계속 인정할 것을 거부하여 버마인을 분개시켰으며 더욱이 영국의 자유방임 경제정책들은 버마 국민 대부분을 소외시켜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러한 일들로 1931년 농민 봉기가 일어났으며 그로 인해 1937년 영국은 버마를 인도에서 분리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일본에 점령당했으며 1948년초까지 다시 영국의 통치를 받았다. 


북에서 남으로 종단하여 흐르고 있는 에야와디(Eiyawadi)강과 그 지류 칭두잉(Chindwin)강 유역에 펼쳐져 있는 중앙 평원 지대에는 다수민족인 버마족이, 북 및 동서쪽 산악 지대에는 소수민족들이 거주하고 있다는 것이 미얀마 민족 분포의 대략적인 구도이다. 소수민족들이 대체로 산족(山族)이라는 이 구도는 동남아시아 대륙부의 일반적 경향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민족 구성과 거의 병행하여 언어도 다양한 분포를 나타내고 있다.    다수민족인 버마족 외에 고산족들을 포함하여 130여 개의 소수민족들로 구성되어 있는 미얀마의 대표적 소수민족으로는, 카인(Kayin)족, 카친(Kachin)족, 카야(Kaya)족, 칭(Chin)족, 뭉(Mun)족, 라카잉(Rakhain)족 그리고 샨(Shan)족, 이렇게 7개 민족을 들 수 있다. 인구수로 따진다면 카인족, 샨족, 라카잉족, 뭉족, 칭족, 까칭족 그리고 카야족 순으로 볼 수 있는데, 이들 소수민족들은 각각 자신들의 고유한 언어와 풍습과 문화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와 같이 최대 인구를 가진 버마족이 지배하고 있는 미얀마에서는, 소수민족과의 관계가 1948년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이후 일관되게 이어온 문제 중의 하나였다. 각 소수민족들이 자치권의 확대와 독립을 요구하면서 반정부 무장 세력을 갖추고 버마족에 의한 지배를 계속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군부 세력의 군사 정권이 1989년 6월 국명을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꾼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미얀마는 하나라는 단결과 화합을 열망하는 군사 정부의 소수민족들에 대한 회유(懷柔) 차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들 민족들의 분포 지역을 보면, 버마족이 주로 거주하는 중·남부의 도(道 ; division)를 제외하고는 주(州 ; state)별로 각 소수민족들이 분포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인구가 가장 많은 버마족은 에야와디강 중·하류 지역의 평야 지대에 주로 거주하고 있고, 한편 소수민족 중 가장 강력한 그룹인 까잉족(까렌족)은 남부의 에야와디도(Eiyawadi division)를 비롯하여 까잉주(Kayin state), 뭉주(Mun state)에 주로 거주하고 있다. 샹족은 샹주(Shan state)의 샹고원과 북부 까칭주(Kachin state)에 주로 거주하고 있으며, 라카잉족은 거의 대부분 라카잉주(Rakhain state)에 거주하고 있다. 그 외 소수민족들은 국경 지역을 중심으로 한 7개의 주(state)에 주로 분포되고 있다.   버마어는 계통적으로 보면 차이나-티베트어족(Sino-Tibetan)의 티베트-버마어계(Tibeto-Burman)의 로로-버마어군(Lolo-Burmese)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미얀마의 민족 구성을 이러한 언어 계통을 기준으로 하여 나타내 보면, 대다수가 티베트-버마계이고 다음은 타이계, 뭉-크메르계이다. 


3. 언어와 문자   


버마는 현재 약 68%를 차지하는 최대 다수민족인 버마족을 비롯하여, 카인족, 카친족, 카야족, 칭족, 뭉족, 라카잉족 그리고 샹족, 이렇게 7개의 주요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연방 국가이다. 이들 여러 민족들은 각기 독자적인 언어를 가지고 있으나, 이 가운데에서도 버마어는 버마족의 모어(母語)일 뿐만 아니라 미얀마 총인구의 약 90%의 통용도를 가지고 있는 유일한 공용어이다. 또한, 1885년부터 1948년까지 63년간의 영국 식민지의 영향으로 영어도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인도어와 중국 광동어도 일부 사용되고 있다.  버마어는 단음절어이자 성조어의 특징을 갖는 티베트-버마어계 언어이지만, 문자는 북인도의 브라흐미(Brahmi) 문자에서 파생된 남인도의 빳라봐(Patrabwa) 문자를 개작(改作)한 뭉 문자를 거의 그대로 답습한 차용 문자이다. 버마어의 기본 문자는 33개인데, 29번 째 문자인 와(wa)는 동그라미인 원 그 자체로서 이 문자가 모든 문자의 기본이 되고 있다. 따라서, 이 문자를 얼마나 정확하고 아름답게 쓸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좋은 필체의 관건이 되고 있다. 이 문자는 원만을 존중하는 미얀마인의 국민성의 상징이기도 하고, 또한 보름달과 같이 만족스런 완벽을 동경하는 미얀마인의 감정을 잘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4. 자연 환경   


인도차이나반도 서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미얀마는 북쪽으로 중국, 북서쪽으로 인도와 방글라데시, 동쪽으로 라오스 및 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인도양에 속하는 벵갈만(bay of Bengal), 마르타반만(gulf of Martaban) 그리고 안다만해(Andaman sea)와 접하고 있다. 국토 면적은 약 68만㎢로 남북한을 합한 한반도의 3배가 넘고, 인구는 약 6천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전인구의 약 90%가 불교신자이고, 기독교(카인족, 카친족, 칭족 등의 소수민족)와 회교가 각각 4%, 그리고 힌두교가 2%로 추산되고 있다. 수도는 과거에는 랭군(Rangoon)으로 알려졌던 인구 약 600만 명 정도의 항구 도시인 양공(Yangon)이였다가 최근 군사정권이 네피도로 옮겼고, 시차는 한국보다 2시간 30분 늦다.    기후를 보면, 미얀마는 열대 및 아열대 기후대에 위치하고 있어 전반적으로 고온 다습하다. 1년을 3계절로 구분하는데, 3월부터 6월까지는 여름이고, 7월부터 10월까지는 우기이며, 11월부터 2월까지는 겨울이다. 겨울이라고 하지만 한국의 겨울과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 다만 여름에 비해서 다소 온도가 낮은 관계로 이렇게 부를 뿐이다. 버마의 행정 구역 단위는 따잉(tain ; division)과 삐내(pyine ; state)로 분류되는데, 미얀마 국토는 7개의 따잉과 7개의 삐내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따잉에는 주로 다수민족인 버마족이 거주하고 있고, 삐내에는 주로 7대 주요 소수민족들이 각각 거주하고 있다.   


5. 사회 환경   


미얀마의 고대 시대는 흔히 타국가에서 보는 것처럼 부족 국가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티벳 방면에서 티벳 및 버마어를 사용하는 여러 부족들이 남하하여 1044년까지 할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 민족의 할거 상태를 통일하여 미얀마 최초의 왕조를 건립한 사람이 바로 아노야타(Anoyahta : 1044-1077)왕이었다. 아노야타왕은 뭉(Mun)족을 정복하고, 미얀마 중부에서 1056년에 바강(Bagan) 왕국을 창건하였다. 이 바강 왕조는 1084년부터 1167년까지 약 80여 년 동안 황금 시대를 구가하였으나, 1287년에 원나라(몽고)에게 망하였다. 그 후 미얀마는 삥야(Pinya) 왕조, 잉와(Inwa) 왕조, 따웅응우(Taunngu) 왕조, 냐웅양(Nyaunyan) 왕조, 그리고 마지막 왕조인 꼬웅바웅(Kounbaun) 왕조를 거쳐 1885년부터 1948년까지 영국 식민지 시대를 겪었다. 아웅상 수찌 여사의 아버지이자 버마의 독립영웅인 아웅상 장군은 1932년 양곤대학에 입학한 후 동맹휴학을 지도하며 전국학생연합의 초대 서기장으로 선출됐고 독립을 표방한 타킨당의 서기장으로 선출되는 등 독립운동가로 명성을 떨쳤다. 이에 대응해 영국정부는 1940년 여름 아웅상 장군 체포령을 내렸다. 결국 아웅상 장군은 일본으로 피신을 했다. 한편, 당시 일본은 1937년에 시작된 청일전쟁을 치르던 중이었다. 청일전쟁 당시 영국은 중국의 장개석에게 버마를 통해 무기 등의 전쟁물자를 보급하고 있었다. 이에 일본은 버마를 장악한다면 영국으로부터 보급로를 차단해 청일전쟁에서 유리해 질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또 버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한다면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아시아 해방운동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판단도 내렸다. 이에 따라 일본은 버마의 독립을 돕게 된다. 아웅상 장군은 일본정부의 도움으로 ‘30인의 동지들’과 함께 당시 일본령이던 중국 하이난 섬에서 버마 독립군을 양성했다. 2차 세계대전에 일본이 참전한지 한 달 뒤인 1942년 3월, 버마 독립군은 일본군과 함께 양곤으로 진격해 영국의 식민지정부를 무너뜨렸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버마에는 버 마우를 지도자로 정부가 설립됐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실질적으로 버마를 식민지배하며 억압했다. 이에 아웅상 장군은1944년 반파시스트 인민 자유동맹(AFPFL, Anti-Fascist People's Freedom League)을 결성, 연합군과 함께 일본군에 대항해 싸웠다. 일본군이 연합군에 의해 물러난 뒤 버마는 다시 영국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이전의 식민지배 시절 같은 억압은 없었지만 완전한 독립 또한 아니었다. 버마의 온전한 독립을 위해 아웅상 장군은 1947년 1월 런던으로 건너가 영국총리와 ‘애틀리-아웅상 협정’을 맺었고, 이는 후에 버마 독립의 초석이 되었다. 같은해 4월 선거에서 아웅상 장군이 이끄는 AFPFL이 대승을 거두었다. 아웅상 장군이 독립 버마의 초대 수상으로 선출될 것이 유력한 판세였다. 하지만 3개월 후인 1947년 7월 아웅상 장군은 양곤의 회의실에서 회의 중 6명의 행정참사회원과 정적(政敵)에 의해 암살을 당했다. 아웅상 장군 암살사건으로부터 6개월이 흐른 후인 1948년 1월 버마는 영국으로부터 정식으로 독립했다. 독립 당시의 국호는 버마연방(Union of Burma). 아웅상 장군의 오른팔이었던 우 누가 버마 연방의 초대수상으로 취임했다.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후, 미얀마의 첫 번째 수상으로서 우누(U Nu)가 취임하였다. 우누 수상은 1962년 네윈(Nei Win ; 1911-2002)의 쿠데타에 의하여 권좌에서 물러날 때까지, 거의 10여 년 동안을 재임하면서 신생국으로서의 기반을 잡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우누는 지도력의 결핍으로 집권 내내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1962년 3월 네윈이 거느리는 버마군은 쿠데타를 일으켜 우누 정권을 타도하고 혁명 위원회를 구성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 후 군에 의하여 조직된 버마사회주의계획당(BSPP : Burmese Socialist Program Party)이 유일한 합법 정당으로서 버마에 군림하고, 1988년 반(反)네윈 버마 민주 항쟁이 일어날 때까지 버마식 사회주의(Burmese Way to Socialism)를 국가의 정치 이념으로 하는 정치 체제가 확고하게 유지되었다.    버마 민주 항쟁은 1988년 3월 양공대학 학생 소요를 출발점으로 시작되었다. 그 후 학생을 중심으로 하였던 네윙 체제의 버마식 사회주의에 대한 분노는, 6월부터는 공무원 및 일반 시민에까지 확산되어 전국민적 민주화 운동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 항쟁 때 자유의 화신으로 혜성처럼 등장하였던 아웅상 쑤찌 여사는 아웅상 묘소 폭파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널리 알려졌던, 미얀마인들에게는 거의 신화적 존재이자 영웅으로 추앙되고 있는 독립 투사 고(故) 아웅상 장군의 딸로서, 미얀마의 자유를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기울인 인물이다. 결국 버마 민주 항쟁은 실패로 끝나고 신군부 정권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지만, 이러한 민주화 운동의 뼈를 깎는 노력으로 말미암아 쑤찌 여사는 1991년 미얀마의 영예이자 세계의 영예인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당시 신군부 정권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인정하려고 들지 않았다.    1960년대만 해도 필리핀과 함께 아시아에서 경제적 강국으로 군림했던 미얀마는, 과거 1962년부터 1988년까지 26년 동안 네윙이 주도하였던 버마식 사회주의의 철저한 고립·폐쇄주의 정책으로 말미암아, 외국과의 교류가 거의 차단되어 마이너스 경제 성장을 기록하였다. 그리하여 풍부한 천연 자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얀마는 결국 1987년 UN으로부터 세계 최빈국(world's least developed nations)의 한 국가로 불명예스럽게 공식 지정되는 수모까지 겪게 되었다. 그렇지만 군사 정권의 계속적인 정권 유지를 위해서는 경제난의 해결이 급선무임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했던 군사 정부는, 외자 도입이 근본적인 경제난의 해결책임을 깨달아 1997년에는 ASEAN(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에도 가입하는 등, 미얀마의 경제적 개방 정책을 표명하였다. 이와 같이 미얀마는 현재 경제적으로 새로운 물꼬가 트이게 됨으로써, 후진국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미얀마 정부의 국가적 최대 목표는 가시화되고 있다. 이러한 군사 정권의 미얀마 경제를 살리려는 부단한 노력이 때늦은 감이 없지는 않으나, 어쨌든 미얀마 경제는 본격적인 개혁·개방의 바람을 타고 활성화될 전망이다. 





 미얀마 군사 정부는 2002년 5월 6일 아웅상 쑤찌 여사의 가택 연금을  해제하였다가 2003년 다시 가택연금을 실시 하였다. 2010년 11월 군사정부는 아웅산 쑤찌여사를 석방하였다. 미국과 유럽연합(European Union) 국가들은 일제히 이와 같은 군사 정부의 결단을 환영하였다. 향후 신헌법 제정 등 아웅상 쑤찌 여사와 군사 정부와의 계속 있을 협상에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리고 해외 방문 등 정치적 활동이 완전히 자유로워진 아웅상 쑤찌 여사의 행보에도 세계의 수많은 이목이 모아지고 있다. 이와 같이 미얀마 민주화를 향한 아웅상 쑤찌 여사의 정치 활동과 무한한 잠재력이 있는 미얀마의 경제 부흥은 개방화 물결 속에서 크게 기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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