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대장정

윤희진 회장의 나의꿈,나의열정 브라보 양돈인생

2016. 12. 28. 11:35 - 유라시아대장정
윤희진 회장의 나의꿈,나의열정 브라보 양돈인생

이병철 회장 직접면접…축산사업 정예팀 합류

 

2003년 5월 용인자연농원 양돈부 창립 30주년을 기념해 당시 주역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기회를 가질수 있었다. 일본 이코마 고문, 정영철 박사, 우영제 피그엔포크 발행인의 모습이 보인다.

첫번째 이야기 “축산부국을 향해” 용인자연농원(상)


지난 1968년 대학졸업과 함께 당시 축산업진출을 서두르던 삼성그룹 입사를 계기로 사실상 양돈인생의 첫발을 내디딘 윤희진 다비육종 회장. 올해 초 민동수 대표에게 다비육종 경영전반을 일임하며 일선퇴진을 선언, 큰 충격을 던져주기도 한 그는 1세대 양돈인으로서 끊임없ㅁ는 성장동력 제공을 통해 산업 발전을 주도해온 한국양돈산업의 거목이다. 윤희진 회장의 40여년 양돈인생, 그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을 되돌아보면서 굴곡진 한국 양돈사의 면면을 들춰보았다.


박정희 대통령 권유…삼성 축산업 진출 의욕적

대규모 종합축산단지 조성 계획 점차 흐지부지


사라진 삼성목장의 꿈


지난 ’68년 7월, 삼성그룹 비서실로부터 서울 농대로 졸업생 추천의뢰서가 날아왔다. 당시 호주와 뉴질랜드를 방문하고 돌아온 박정희 대통령이 재벌 총수들에게 축산업에 투자할 것을 권유하면서 삼성그룹 차원에서 축산업 진출을 본격 추진했기 때문이다.

 

삼성빌딩(구관) 505호실에서 이병철 회장의 직접 면접을 거쳐 18명 중 나를 포함하여 4명(축산학과 2, 농경제과 1, 농학과 출신 1)이 선발됐다. 다만 세상 사람들이 궁금해 하듯이 실제로 관상 전문가까지 배석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같은 시기에 서울 공대에서도 특별 전형(전자학과 출신은 첫 모집이라고 하였음)이 이뤄지면서 이들 틈에 끼여 삼성그룹 신입사원 연수코스인 대구 제일모직 공장에서 한달간 훈련을 마치자마자 ㈜중앙개발에 배치됐다.


우리의 팀장은 주현배 박사였는데 이분은 농진청 소속으로 주월남 농업기술지원단장까지 거친 베테랑이었고 후에 미국으로 건너가 네브라스카주와 버지니아주 공무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6개월간에 걸쳐 가칭 삼성목장의 사업계획을 마련했는데 신갈 근처(경부고속도로 건설되기 전)에 300만평의 땅을 매입하고 당시 돈으로 29억원을 투자하여 소, 돼지, 닭 등 종합축산단지를 건설한다는게 그 골격이었다.


사업계획 마무리단계에는 안국화재(현 삼성생명) 손경식 차장(현 CJ 제일제당 회장)이 투입돼 계수 검토를 했고 맹희 부사장(이병철 회장 장남, 당시엔 이렇게 불렀다)까지 직접 들러서 인공수정이 어떻고 등등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이병철 회장의 경우 공개석상에서 “이제부터 삼성그룹의 신규사업은 전자사업과 축산업”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강한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 삼성전자를 시작하면서 이 회장은 사돈지간이자 절친했던 LG그룹 창업자 구인회 회장과 발을 끊은 상태였다.

문제는 아무리 따져봐도 축산업의 투자 대비 수익성이 영 신통치 않다는 점이었다. 더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정부의 관심도 수그러들었고 삼성그룹 차원에서도 다른 급한 사업이 많았기에 목장 계획은 점차 흐지부지 됐고 우리 팀도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필자는 기획조사실에서 호텔사업 검토(나중에 신라호텔 신규 프로젝트팀으로 발전) 같은 업무를 하기도 했고 경북대 임학과 임모 교수와 함께 삼성 관계사 전 사업장의 조경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그러던중 용인자연농원(현 에버랜드) 사업이 구체화 되면서 안양 골프장에 내려가 그 준비작업에 착수했다.


당시 근처 야산에 개량종 밤나무 3천600그루를 심어도 봤고 카나리아에서부터 여러 종류의 앵무새, 공작새, 사슴, 곰 등 각종 동물은 물론 연못에 키울 비단잉어에 이르기까지 별걸 다 수입해서 통관하고 부화, 증식시키는 것이 나에게 떨어진 임무였다. 창경원의 수의사들과 김정만 과장(작고)은 나의 단골 선생님들이었다.


곰의 경우 일본 북해도에 있는 노보리베츠(자기네 말로는 세계 최대의 곰 목장이라고 함)에서 수입했는데, 안양으로 수송 도중 상자 안에서 질식사, 하는 수 없이 종로 5가에서 웅담으로 처분했더니 곰값을 제하고도 오히려 돈이 남는 등 웃지못할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이병철 회장은 1주일에 3번 골프장을 찾았는데 운동 후에는 가끔 새장이나 밤나무 동산에 오르는 등 하여간 매사 연습을 시켜보고 하나하나 챙기는, 그런 타입이었다. 골프장 한쪽에서 닭과 돼지를 기르고, 코스 중간에서는 씨 없는 포도까지 재배하고 골프장 손님들에게 계란을 선물용으로 팔기도 했다.

 

두번째 이야기 “축산부국을 향해” 용인자연농원(중)


돈사 100동 건립 강행군…이병철 회장이 직접 챙겨

日서 종돈 입식 불구 사양기술 열악…폐사방지 총력


 

용인자연농원 준비작업 당시 우리 담당과장은 권배씨(작고, 전 사료협회 전무)였는데 이병철 회장의 상당한 신임을 받고 있던 것으로 기억된다. 또, 이건희 부회장은 상당한 애견가로 직접 진도에 내려가 백구, 황구 30여 마리를 선발해 보내오기도 했다. 영문으로 된 두툼한 개 백과사전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72년 용인자연농원 건설이 본격화되고 사업추진이 용이한 언론사에서 ‘용인개발본부’란 이름으로 밀어붙였기에 필자도 중앙일보 3층 회장실 옆방으로 옮기게 됐다. 말석이지만 이 회장이 주재하는 사장단 회의에 배석하기도 했는데 그 권위가 대단했다.

 

우선 사장단 멤버 중 전직 장관이 세분이나 되었는데, 중앙일보 홍진기 회장(사돈이자 전직 내무부, 법무부 장관), 삼성물산 김정열 사장(초대 국방부 장관), 박동묘 성균관대 총장(전직 문교부 장관) 등 신문 방송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분들이 회장 앞에서는 절절 매는 것 아닌가. 

이 회장은 회의 틈틈이 당신이 왜 자연농원을 시작했는지 거듭 언급하면서 의지를 내보이기도 했다. 두달에 한번씩 일본을 왕래하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산림이 울창한 일본과는 달리 벌거숭이인 우리의 산을 매우 안타까워 했고 특히 유실수에 관심이 많았다. 이에 용인 땅 450만평 가운데 밤나무 100만평, 살구동산 20만평 등을 조성, 일본에 깐밤 40톤씩을 수출하기도 했고, 거름 때문에 양돈장까지 건설하게 됐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 유실수 가지치기나 거름 주는 것까지 직접 점검하는 등 이 회장은 상당한 전문가였다.


급하게 양돈 사업계획을 만들어 돈사를 지었는데 ’73년 5월 8일 마침내 일본에서 첫 비행기로 실어온 종돈 136마리가 돈사바닥 시멘트가 굳기도 전에 입식돼 마음을 졸이게 만들었다.

중앙일보에 구인광고를 내고 시험을 거쳐 선발한 창설 요원 12명도 같은 날 용인 현장에 도착하였으니 그 모든 것이 ‘번갯불에 콩 구워먹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이때 들어온 대졸 신입 4명 중 세명은 이후 박사(정영철, 윤덕영, 백영진)가 되고, 고대출신 배동만씨는 삼성계열(에스원, 제일기획) 사장까지 지냈으니 사람은 잘 뽑은 셈이었다.


종돈은 일본 Saiboku에서 5월22일과 6월 5일, 그리고 10월에 한 비행기 더 해서 모두 614마리를 도입했다. 종돈 한 비행기가 들어올 때마다 일본인 기술자가 한명 따라와 3주일 동안 A/S를 해 주었는데 당시 국내에는 양돈 관련 책자가 거의 없어 사사자끼 Saiboku 사장이 쓴 ‘양돈대성’이 유일한 우리들의 교과서였다.


돼지코에서 피가 나와도 AR이 뭔지도 모를 정도였는데(도입 후 석달 동안은 폐사가 없었지만) 원종돈이라고 도태는 절대 못하게 했고 한마리라도 죽게 되면 우영제 수의사와 나는 본사 본부장에게 불려가 혼쭐이 나곤 했다.


자연농원 양돈장이 들어선 용인 포곡면 일대는 원래 좀 추운 지역인데 그 당시 추위는 정말 대단했다. 그렇다고 2년 동안 돈사 100동을 짓는데 춥다고 멈추는건 ‘삼성스타일’이 아니었다. 직사각형 건물 기초부위에 왕겨를 뿌리고 불을 붙여 언 땅을 녹인 다음 흙을 파내고 공사를 강행했다. 아침 6시에 기상, 구보를 시작하여 저녁엔 교육 등 군대가 따로 없었지만 열심히 배우고 일했다.

 

이때는 이 회장께서 산너머 한옥에 상주하며 서울로 출퇴근 하던 시절이라 상시 초비상 태세였다. 아침에 서울에서 송세창 비서실장이 모시러 오고 다시 저녁에는 용인까지 수행하여 모시고 오는 그런 식이었다. 양돈 현장에도 거의 매주 한두번, 언젠가는 한주에 세번을 둘러보신 일도 있었다. 이것만 보아도 그분이 용인 자연농원 사업에 얼마나 애착을 가지셨는지 알고도 남을 일이다.


그 당시 나는 결혼한지 1년 반쯤 지났고, 가족은 안양에 있는 삼성 사우촌에 살았는데 도저히 농장을 비워놓고 집에 갈 수는 없었다. 하다못해 큰애 돌 날도 밤 늦게야 집에 도착하니 손님들은 다 돌아가고 아무도 없었다. 요즘 같았으면 이혼감인데 용케 참아준 아내가 평생 고맙기 그지 없다.

 

세번째 이야기 “축산부국을 향해” 용인자연농원(하)


5개돈장 6만두 사육…인근 집집마다 F1 분양 ‘양돈 메카’ 계기

경영체제 바뀌며 사업 폐쇄…동료모임 ‘모교없는 졸업생’ 심정


이병철 회장께선 용인자연농원에서 돼지가 생산되자 마자 F1 거세돈 1마리씩을 동네 집집마다 나눠주라고 하셨다. 사료는 부산 공장에서 수원역을 거쳐 실어왔는데(CJ 인천공장 생기기 전), 이를 계기로 용인 포곡면 일대가 국내 최대의 양돈밀집지역이 됐다.


이 회장은 당시 전국 양돈장의 호당 사육두수가 평균 두마리도 안되던 시절(120만두/70만 호)에 5만두 사육계획을 세울 것을 지시했다. 돈사사이에 그늘이 지도록 아카시아 나무를 심으라고 하면 다음날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심어 놓아야만 했고 돈사 한쪽에 야생 멧돼지를 키우라고 하시는데, 백신을 놓을라 치면 우영제 수의사와 전봉춘 조수는 목숨 걸고 달라붙을 수 밖에 없었다. 

새끼가 자꾸 죽어서 고민도 적지 않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집돼지와 같이 키우면 안되는 것이었다. 또, 동물원 쇼에 나갈 돼지를 훈련시키라는 말씀도 하고, 일본 NHK 양돈 프로그램을 녹화해 공부까지 시키는 등 끊임없이 숙제를 내 놓았다.

 

두달에 한번 꼴로 일본에 가실 때 마다 현지의 각분야 최고 전문가에게 자문을 받아 밤나무나 사자 키우는 것부터 양돈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전문 지식을 갖고 계셨다. 일본 기업양돈장인 ‘소가노야’에서 1년 반이나 연수하고 온 윤석두(양돈부장 역임)씨에게 “그 집 사료 요구율이 얼마더냐”라고 묻자 “3.5”라는 윤씨의 대답에 “저 놈 엉터리로 배웠다”고 말할 정도였다(본인은 3.2로 알고 계시다고…).


초창기 용인 사업소에는 현장을 총괄하는 육군 중령출신 소장이 있었는데 웬일인지 별도의 조직으로 운영된 양돈사업소는 필자가 명색이 소장이었다. 직원 중에는 대학 동기, 심지어 1년 선배인 수의사도 있어서 통솔이 쉽지는 않았다. 만 28세도 안된 어린나이(?)에 책임자로서 벅찬 일이었지만, 이 때부터 “양돈을 나의 직업으로 삼겠다, 기업화/규모화 하는데 내가 앞장서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게됐고, 평생 동안 이 생각은 한번도 바뀌지 않았다.


토요일엔 회장 주재 ‘한옥회의’에 불려 갔는데 부장이 공석일때는 과장인 필자가 참석해야했다. 2년여 동안 부장을 여섯분 모셨다. 제일제당 출신 유소열 부장(작고)이 오기 전까지 안양연구소 출신 수의학박사, 육사8기 대령 출신, 중앙일보 정치부 기자 출신 등이 거쳐 갔지만 모두 3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이 회장의 사위이면서 LG 구자경 회장의 동생인 구자학 자연농원 사장이 필자를 많이 아끼셨는데, 어느날 제일제당 부산공장으로 발령을 내 주면서 정도 들고, 한도 많은 용인을 떠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지금은 믿기지 않지만, 양돈장 초기에는 단지 앞을 흐르는 경안천 물을 그냥 퍼 올려서 상수도 물로 사용했는데 나중엔 재벌들 싸움속에서 양돈장 오폐수 사건이 큰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고, 그 후 주변 공장들 때문에 경안천이 영동고속도로에서도 화공약품 냄새가 진동할 정도로 오염되기도 했다. 유한양행에 지금도 농축부가 남아있는지 모르지만 약 거래 때문에 기업 이미지에 걸맞지 않게 ‘로열 패밀리’를 동원, 필자와 최명욱(CJ 전무 역임)씨를 힘들게 만들었던 불쾌한 기억도 남아있다.


한편 용인양돈장은 모두 5개의 돈장으로 나뉘어지고, 최고 6만두까지 사육됐다. 일본 이코마 고문에 따르면 동양 최고의 시설이라던 4돈장(종돈장)이 지금은 창고로, 나머지는 헐렸거나 자동차 전시장, 맹도견, 애완견 등의 사육장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한 때, 자연농원을 먹여살리고 엄청난 실적도 올렸으며 많은 인재를 배출했지만 이병철 회장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해 (1989년) 업계의 저항, 이건희 회장의 새로운 경영방침(21세기 초일류 기업으로…), 돼지 질병문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폐쇄되고 말았다. 지금 와서 보면 태국의 CP처럼 사료 축산분야에서 글로벌 기업으로 키울 수는 없었는지 큰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손자인 CJ 이재현 회장이 중국-동남아에서 사료양돈사업을 하는 것도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후 30주년이 되던 2003년 5월 초 147명의 옛 동지들과 일본 자문이던 이코마 히로오선생까지 모여 추억과 아쉬움을 나누었고 이후 1~2년마다 꾸준히 만나고 있지만 모교 없는 졸업생 같은 심정을 떨쳐버릴수 없다.

 

네번째 이야기 원칙을 고집한 선진, 그리고 성공(상)


선진 모태 제일종축 열악환경 불구 경영활동 전폭지지

농장·사료·육가공 자체수익 재원 조달 괄목성과 이뤄


 

제일종축농장 입구(개축 전).

30대에 원 없이 일하다

제일제당 부산공장에서 4개월을 근무하다가 그만두고 바로 이천에 있는 제일종축농장으로 가 보니 농장 울타리도 없고 시간개념도 없이 눈뜨면 출근하고 전기가 나가면 발동기로 물을 퍼 올리는, 도저히 기업이라고 할 수 없는 그런 지경이었다.

 

정병성 수의사(현 삼원농장 대표) 외에는 눈에 띄는 직원도 없고 돈사 시설도 형편 없었으나 미국에서 카길을 통해 도입했다는 SPF 종돈(99두) 만큼은 썩 괜찮았다. ‘선진’의 모태인 제일종축농장은 서울공대 출신 다섯분과 신학대학 출신의 윤도진 사장이 경영을 맡은 동업체로 출발하였으나 윤사장이 단독으로 소유한 사료공장의 공동 참여문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결별하기에 이른다. 

’75년 10월, 이인혁 회장의 동생 이예혁씨와 필자가 동시에 부임했다.

이예혁씨는 주로 자금, 자산관리를 맡고 돼지관리와 사업 확장 쪽은 필자가 맡아 10년 가까이 좋은 콤비를 이뤘다.

농장 내에 있는 사택에서 3년쯤 살았는데, 비오는 날은 비도 새고 10km정도 되는 이천 읍내까지는 완전 자갈길에, 당시에는 차 한대도 없는 시절이어서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우선 6.2km 떨어진 곳에 종돈장(선진원종농장)을 분리시켰고 장호원에 ‘코리아 화암’(현 동원리더스아카데미 자리), 그리고 마지막 작품으로 충북 진천에 SPF 종돈장을 세워 ’85년 6월말 그만 둘 때에는 총 5만두까지 사육규모가 늘어나게 됐다.

농장과 선진사료, ‘코델리’라는 육가공업체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을 추가투자 없이 약간 배당도 해 가면서 거의 자체수익으로 재원을 조달하였으니 엄청난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필자가 ‘주인’을 잘 만난 것은 이인혁 회장이란 분이 경영에는 거의 관여를 안하면서 전문가 의견을 존중하고 배당은 최소로 하되 마음껏 일을 벌일 수 있도록 주주들을 설득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선진사료 출범 당시에는 사료업이 허가제였기 때문에 남의 면허를 사올 수 밖에 없었다.

마침 제당3사(제일제당, 대한제당, 삼양사)가 공동으로 갖고 있던 영등포 동립산업 사료공장이 이전하자 간판만 인수하고 이천에 공장을 새로 짓게 됐다.

실무 책임자로는 필자의 대학동창인 퓨리나 출신 최환의 상무를 영입하고, 주주중의 한 분인 이원복 사장이 대표를 맡았다. 자가물량이 월 1천500톤 정도 되기는 하였으나 사료사업이 될 지, 안될 지 자신이 없었다.

일단 150톤의 규모로 공장 투자는 최소화 하고 사무실도 지을까, 말까 하다가 ‘싸구려’로 지었을 정도였다.

회사 이름은 이인혁 회장과 마주앉아 몇 개의 후보 중에서 ‘선진’으로 정하기로 했다.(당시 경기도의 ‘선진경기’ 구호가 꽤 괜찮아 보였기 때문에)

’81년 10월 당시엔 사료가격도 당국의 통제를 받던 시기여서 농장을 갖고 있던 대부분의 사료업체들이 자가 농장용, 판매용을 따로 만들고 있었으나 선진사료는 양돈 사료 전문업체에다 자가용, 판매용 구분 없이 오히려 농장 쪽과 함께 품질개선을 해 나가다 보니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됐다. 생산량은 16개월 연속 신기록 행진을 이어갔고, 2년 반 만에 투자액을 회수하는데 그치지 않고 계속 설비증설을 해야만 했다. 선진축산 그룹의 확실한 성장동력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제일종축 농장은 평당 3만원짜리 돈사여서 단열도 전혀 되지 않았고 자동화 설비는 기대할수도 없었다. 한동, 한동씩 부수고 모두 새로 지으면서 모돈 규모도 1천300두로 늘렸다. 제일 큰 어려움은 당시 박민철(주주 겸) 사장이 너무 소심한 분이어서 규모를 늘리기는 커녕 돼지 값만 떨어지면 줄이자고 하는 통에 그분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한편 제일종축 농장은 옆에 있는 제일농장과 함께 이 무렵부터 비육돈 위탁사육이 시작돼 ’82년도에는 7개 농가로 늘어났다. 규모는 비육용 자돈 300두 단위, 수수료는 증체 kg당 160원이니까 두당 9천600원(자돈 30~90kg 출하기준), FCR 3.2, 폐사율 1% 기준이지만 실제 연간 폐사율은 0.5%밖에 안되었으니 지금과 비교하면 질병도 별로 없고, 돼지가 엄청 건강했던 셈이다.

 

다섯번째 이야기 원칙을 고집한 선진, 그리고 성공(중)


국제수준 SPF 종돈장 목표 직원 해외연수 등 벤치마킹 집중

美서 404두 수입…일반농장 위생수준 못미쳐 적응 못해


 

SPF돈군 조성을 위한 제왕절개 수술(분만 2일전, 진천 GGP LAB에서).

SPF 돈군 조성에 도전

‘코리아 화암’ 동원산업 김재철 회장은 이인혁 회장과 가까운 사이여서 양돈사업에 흥미를 갖게 되고 새로 건설하는 농장에 30% 참여하기로 했다.

 

이분들이 일본 가고시마에 있는 미쯔비시 그룹에서 운영하는 6만5천두 규모(나중에 10만두)의 ‘Japan farm’을 보고 나서 그 회사처럼 키우자고 ‘코리아 화암’으로 작명을 한 바 있으나 별도 경영을 한 탓인지 그렇게 성공적이진 못했다.


장호원 백족산 기슭에 22만4천평의 야산을 매입(평당 1천원에 땅값 흥정을 하다가 점심 먹고 오니 200원이 올라 결국 4천400만원짜리 점심이 되었음) 한창 정지공사를 할 무렵 나의 대학 은사이신 돈학전공 이용빈 교수님(작고)을 모시고 제일 전망 좋은 언덕에 내리니 평소 과묵하신 이 어른이 엄청난 공사 규모에 놀라 “돼지는 위대하다”고 감격해 하시던게 엊그제 같다.

 

삼성에서 잠깐 모셨던 네브라스카 주정부 공무원인 주현배 박사를 통해 미국의 SPF 종돈 사정을 알고 나서부터 우리나라에도 위생수준을 한차원 높인 종돈장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취지에서 고문으로 모시던 서울수의대 박응복 교수와 함께 당장 네브라스카 수의대에 가서 세계최초 SPF 개발자 두분 중 한 분인 Underdahl 교수(또 한분인 Dr.Young은 작고)를 만나고 돼지제왕절개 시술 장면도 보았다.

 

오는 길에는 일본 스미토모 사료축산의 기누가와 SPF 종돈장도 방문했다.

농장 부지는 음성 지역에 비행장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있어(청주 비행장 건설 전) 진천에 12만평 부지를 마련하고 직원 3명(김동식, 허문도, 이병묵 수의사)을 즉시 네브라스카 대학에 연수를 보냈고 404마리의 SPF 종돈을 수입해 비행장에서 바로 새 농장에 입식 시켰다.(검역소에서 혹시라도 오염될까봐)

 

분만 이틀 전 제왕절개 후 4주 동안은 자돈을 무균상태로 키우기 때문에 초유대신 SPF LAC(연유) 캔을 수입해다 먹이고 사료오염 방지를 위해 농장에서 펠릿 사료제조를 하고 나중에는 여주까지 갖고 가서 감마레이 살균을 해오는 등 별 짓을 다 했다. 스미토모의 花岡(하나오카) 부장(수의사)이나 북해도 대학의 나미오카 교수도 여러번 와서 도와주었고, 일본 SPF 저널이 많은 참고가 됐다.

이병묵, 이원형, 정현규 수의사가 초기에 애를 많이 써주셨다.


일본처럼 도입단계에서부터 기업과 대학, 연구소가 같이 추진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우리는 기초연구나 자료도 없었다.

안양가축위생연구소에서는 그때까지 SPF 인증기준은 없었고 심지어 질병유무 검사도 비공식으로만 해주는 형편이었다.

몇 년 후 TV에 그 기관의 책임자가 나와 거기서 다 해준 것처럼 방영되는 걸 보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또 처음에 일반농장에는 위생도 차이가 너무 커서 입식 시키자 마자 돼지가 죽어버리기도 했다. ’09년말, 일본 SPF협회 자료에 의하면, 젠노 등 7개 피라미드에 184농가 85만9천두(9%)가 사육되고 있고, 계속 증가 추세라니 부러웠지만 우리는 너무 일찍 시작했고 또 너무 크게 벌리는 바람에 더구나 중간에 내가 회사를 그만두게 되어 결과적으로는 회사에 큰 손해를 입히고 말았다.

 

한편 종돈 개량의 발자취를 보면 수퇘지 검정은 ’77년도부터 IOWA 대학식의 수퇘지 능력검정을 시작했다.(♂ 4두/돈방당)

또한 계통 조성은 유럽 종돈수입이 처음으로 허용된 ’82년 11월 4일, 스웨덴 종돈을 여러농장이 같이 도입했는데 부산 검역소에서 돈콜레라가 발생해 다수 폐사했으나 제일종축 돼지는 온전하게 건질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79년 5월, 이바라기현 LL 계통돈 ‘로즈’를 탄생 시켰기에 지바현 축산시험장에 김동식씨(현 신청봉농장 사장)를 보내 3개월간 계통조성 실무교육을 이수받게 했다. 이 때 도입한 Swedish LL 50두(♀ 40 + ♂ 10)를 기초 돈군으로 7세대에 걸친 계통조성사업을 시작했다. 나중에 이 종돈들은 일본에 수출도 하며 큰 인기를 끌었지만 ’95년에 오제스키병에 감염돼 모두 처분된 것은 지금 생각해도 무척 안타까운 일이었다.


제일종축농장 임직원들이 체육대회 후 자리를 함께했다.(앞줄 제일종축 푯말 뒤에 이예혁 사장, 그 오른쪽으로 이인혁 회장과 필자)

 

여섯번째 이야기 원칙을 고집한 선진, 그리고 성공(하)


원칙·인적자원 중시 경영, 계열화 사업 등 성공 원동력

이인혁 회장 수차례 퇴사 만류…과분한 퇴임식까지


선진은 뭐가 달랐나?

선진만의 차별화된 경쟁력을 위한 노력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철저한 차단방역 - 농장입구에 사무동 건물을 지으면서 예외 없이 샤워 후 옷, 장화를 갈아입고(신고) 소독을 했다.

’82년 하반기 돼지콜레라 백신이 잘못돼 전국적으로 20만두가 폐사하고(전체 사육두수 230만두 일 때) 심지어 인근 농장까지도 발생했지만 제일종축만은 안전했다.

둘째, 시설자동화 - 인력을 줄이고 사육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국내 최초로 일본에서 스크래퍼 6세트, 미국에서는 ACME 무창돈사 설비를 도입했다. 쿨링패드를 설치하자 한여름 바깥 온도가 37℃일 때 실내는 29.5℃로 내려가고 체감온도는 더 시원해져 신기할 따름이었다. 자연농원 분뇨사건 여파로 일본 동해(東海)엔지니어링 시공으로 제대로 된 활성오니 시설을 구축했다. 

셋째, 기획실 운영(홍보, 전산, 교육, 육가공) - 홍보팀에서는 기업 CI 작업을 하고 전산실을 차려 ‘Prime550 전산기’를 가동했다. 관계사 사원 공채 및 교육을 실시하고 본격적인 육가공 사업 준비를 했다. 

넷째, 체계적인 품질관리 - 서울대 축산과 박영일 교수와 수의대 박응복 교수를 육종과 위생 기술고문으로 모시는 한편 ’82년부터 사내 분임조를 조직하고 품질관리 전문가를 초빙하여 매년 경진대회를 실시하므로써 나날이 생산성도 향상되는 효과를 거뒀다.

다섯째, 사원 복지 - 당시의 농장으로는 과분할 정도의 기숙사 시설, 통근버스 운행, 잔디구장, 야간 테니스장, 장학금 지급 등을 대표적 사원복지 사례로 꼽을 수 있다.


’73년에 생긴 용인자연농원, 제일종축농장, 연암전문대 양돈장 이전에는 기업양돈장으로는 평택 남부농산 정도가 있었다. 그 후 여러 농장이 생겼는데 특히(이인혁 회장의 인성수산을 포함) 원양어업을 하는 업체들(구일산업, 대왕수산, 동원수산, 삼원기업, 사조산업 등)이 양돈업에 많이 진출 했으나 지금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유독 선진만이 대성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의 견해로는 우선 양돈산업이 태동기를 거쳐 성장기에 진입하며 호황을 만끽했다.


무엇보다 철저히 원칙에 입각한 경영을 하려 애썼고, 농장-사료-육가공의 순서로 계열화 준비 단계를 밟아 나갔기 때문이다. 

특히 전문 경영인에게 전적으로 위임했다.

 초창기에만 꼽더라도 남대현(부회장까지 역임), 최환의, 장경국(이상 사료),

정영철, 우영제, 이정원, 김동식, 장국원(이상 농장),

김경우(제일제당 육가공, 롯데 근무, 작고) 등 좋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고,

’83년 이후 공채를 통해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모집하고 교육시켰다.

 

 ’85년 6월말 내가 퇴직할 당시 지금처럼 기업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음에도 축산, 수의 전문직이 52명이나 됐다.

이러한 인적자원이 이후 본격적인 계열화 사업, 법인상장, 해외진출 등에 큰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30세에 선진으로 옮겨와 10년 가까이 밤낮없이 많은 일을 했으나 늘 내 농장에 대한 꿈은 버릴 수가 없어 “창업은 늦어도 40세를 넘기지 말아야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 했었다.


이 회장께 말씀드려 자연농원 양돈부에 근무하던 정영철씨를 나의 후임자로 천거하고 곧바로 (’82년) 영국 에딘버러 대학 Animal Production 대학원 코스에 유학을 보내는 한편 우영제씨(현 SRC 사장)를 농장장에, 기획실장에는 장국원씨(현 가보영농 대표)등 용인출신들을 영입해 업무에 차질이 없도록 두루 조치했다.


나때문에 용인 출신들이 줄줄이 이천 땅으로 넘어오게 된 것이다. 사료 책임자인 최환의 상무가 회사를 먼저 그만두게 되자 이원복 사장은 사료사업까지 나보고 맡으라고 여러 번 권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창업을 해야할 시기라는 결심을 굳힌 터라 사료 전문가인 대한제당에 있던 남대현 선배를 영입하기로 했다. 이인혁 회장께서는 그 후에도 여러 가지로 회사에 남아달라며 설득 하시다가 결국은 분에 넘치는 퇴임식과 상당한 액수의 전별금을 주셨다. 퇴직 후에도 지금까지 ‘선진’은 늘 친정처럼, 그리고 이 회장님은 존경하는 어른으로 모셔왔지만 어느 사이 기업의 주인이 바뀌고 말았다.

 

“종돈사업은 인격을 파는 것”…원칙경영 충실

 

열번째 이야기 내 인생의 축복 ‘다비’(Ⅳ)


현지화 종돈개량 노력…국내외 산학협력 기반 전문성 강화

정부 지정 우수 GGP·GP 중 직영·계약농장 1/3 포진 보람


 

다비육종이 22년째 실시하고 있는 다비퀸 세미나. 양돈업계의 높은 관심과 참여 속에 이제는 대형 이벤트로 자리매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명품 돼지고기 만들어 보자


유럽계통은 대체로 지제가 약하고 등지방이 얇아 우리 환경에 맞춰 개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한 부계 역시 성장능력 외에 우리나라 소비자들의 기호에 맞게 오랫동안 노력한 결과, 이제는 마블링 지수를 충분히 올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회사가 잘 되자면 고객들을 잘 모셔야 하는건 기본이고 나는 직원들한테 종돈은 내 인격을 파는거나 마찬가지니 실적에 연연하지 말고 양심껏 해 달라고 당부하곤 한다. 어떤 분은 마음에 안 들면 너의 사장 봐서라도 좀 잘 하라고 우리 직원을 야단치기도 한다.


’93년부터 거래한 장성의 차장곤 조합장(유탕축산)과 청미원의 윤동노 사장 같은 분은 오랜 거래 끝에 우리 회사 주주가 되기도 했고

홍성 홍주골의 김건태 회장은 자기가 평생 돼지 키우는 한은 우리 돼지만 키우겠다는 열성팬(?)도 있다. 


‘다비퀸 세미나’ 대형 이벤트로 

22년째 실시하고 있는 ‘다비퀸 세미나’는 처음 주간관리 보급부터 시작해서 일본 강사(靑木)도 불러오고 영국 수의사도 불러오고 홍수환 선수, 김미화씨도 나오고…, 하여간 업계의 높은 관심과 참여에 힘입어 이제는 사료업체들도 부러워하는 대형 이벤트로 자리매김했다. 


고품질 돈육 자체생산 ‘기치’

도드람포크와 결별 이후 우리 돼지를 키워서 진짜 명품 돈육을 만들어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여러해 전 일본 Saiboku의 SGP(슈퍼 골든 포크)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버크셔를 25% 섞고 하이마블링 듀록을 교배시켰다.

우리는 다른 계열화 업체처럼 사료사업에서 나오는 수익이 없다 보니 수년간 고생고생 끝에 곧 8만두 출하 규모가 되었고 2012년 10만두 출하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 동안 소시모 인증과 농림수산식품부, 경기도(최우수상 및 G마크), 롯데마트 등에서 상도 많이 받았으나 대형화 바람 속에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 고민 중인 것도 사실이다. 

상지대 정구용 교수팀과 5년에 걸쳐 산학협력체제로 품질모니터링을 지속적으로 시행하고 있어 늘 고맙게 생각한다. 


해외교류 통한 인재양성 심혈

주제엔 좀 넘치지만 전에는 일본에도 연수를 보냈고 미국 특히 미네소타 대학 주한수 교수에게도 많이 보내고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받았다. 주 박사가 우리 회사에 실습 보낸 미국 학생에게 직원들이 보신탕을 먹이는 짓궂은 일도 있었지만 하여간 상호교류는 좋은 일이다.


J.S.R.과도 종자 뿐 아니라 연수도 여러명 보내고 매년 몇 번씩 와서 지원도 해 주고 있다.

육종 쪽에는 후배 겸 후임자였던 정영철 박사가 늘 선생님 노릇을 해 주고 있다. 조그만 회사지만 임직원 중에 박사가 2명, 대표이사 포함, 수의사가 5명이 근무 중에 있고 지금도 네브라스카 대학원에 우리 회사 직원 한 명이 3년 예정으로 유학 중인데 국내 대학들이 육종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것이 유감스럽다.

 

조선족 박사(서울대 육종학·박영일 교수), 베트남 석사(한경대 이학교 교수)도 보냈고 축산, 수의계열 대학에 장학금도 열심히 보내고 농장 실습도 시켜 젊은 후계 인력 양성에 노력 중이다. 


단단한 파트너십 최고 경쟁력

우리 회사의 자랑거리 중 하나는 좋은 파트너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직원들이 출자해서 운영하는 농장을 더 키우도록 지원하려 하고, 어떻게 하면 계약농장에게도 잘해주고 도움이 되나 궁리를 많이 하고 있다. 지난해와 올해 정부에서 지정한 우수 GGP/GP 농장 24군데 중에 우리 직영/계약 농장이 8개니까 꼭 3분의1 이었다. 직영/계약 농장 합해 13군데 농장 모두 PRRS 음성화를 진작에 마친 것도 이분들과 마음이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FTA시대 개방화 파고 속에서 국내 종돈, A.I.(인공수정) 사업 1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에 따라 2015년까지 새 선장(민동수 사장) 지휘하에 새로운 해외 제휴선 물색, 돈군 규모확대, 위생 수준 업그레이드 등을 단계별로 추진 중에 있다. 

많은 종돈회사들이 있었지만 우리가 꾸준히 한 방향으로, 가능하면 원칙에 충실하려고 노력한 것이 아직까지 살아남은 이유일 것이다. 


열한번째 이야기 한국만으론 좁다…베트남으로(상)


동남아 돌며 시장조사…‘한포크’ 합작농장 설립계기 도전

현지 양돈시장 계열화 기반 CP 기업 강력독주체제 구축


 

베트남의 돼지수송 모습. 아직 여러가지로 개선할 여지가 많다.

베트남 투자와 북한 종돈


여행 자유화가 되면서 동남아 여러 나라를 가게 되었다.

 

필리핀에는 최진호 박사와 함께 여러번 다녀오면서 처음에는(네덜란드

힘 호스트라는 회사가 지은) 사료공장을 보러 가기도 하고 세거스 종돈회사, 엉터리였지만 조그만 양돈조합에도 가 보면서 앞으로는 국내에서만 지지고 볶고 할게 아니라 해외 양돈에 투자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친구이기도 한 CJ사료의 최명욱 전무가 중국에 양돈장을 하고 싶은데 좀 같이가 보자고 해서 산동성 여기 저기 다니면서 농장 부지 선정도 도와주고 우리 직원을 우한(武漢, Wuhan)까지 보내 종돈 구입처를 조사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곧 이어 ’97년 IMF 사태로 어려워 당분간 해외에 대한 관심은 접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베트남으로 관심을 돌리게 만든 계기는 순전히 추태호 사장 덕분이었다. 

알다시피 베트남은 ’80년대 후반 도이모이 개방정책을 정했으나 우리나라 기업들의 투자는 여러해 지난 다음부터였고 추태호 사장 포함 8명이(2003년 1월 6일 3차 모임 겸 설립 총회) ‘한포크’라는 이름으로 호치민 인근 빈증성(平陽省)에 1만두 규모의 양돈장을 시작하였다. 법인 대표는 이미 베트남에서 CJ 사료 법인장으로 4년을 근무했던 박찬회씨가 맡았다. 

베트남은 얼핏 보면 매력적인 시장이었다. 세계 5위권의 돼지 2천700만두에 육류 중 돼지고기 비중이 80%나 되고 쌀, 커피 등 수출은 세계 2위, 보유 자원은 엄청나고 성장 잠재력은 매년 인구증가 100만명씩 곧 1억 돌파 예상, 거기다 종돈 개량은 20% 정도라고 하고 정서적으로는 중국 1000년 영향권에 있었기에 우리와 비슷하다.(국제결혼해서 오는 신부도 제일 많다.)


다만 ’75년까지 우리와 전쟁을 겪은 전력이 걸리긴 했으나 베트남 정부에서 지나간 일로 치부하고 오히려 한류 열풍, 한국 상품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 지나칠 정도였다. 태국 등 다른 동남아 국가와 달리 한국산 자동차 수입이 일제보다 2배나 많은 것도 하나의 사례이다. 남·북은 하나라지만 남쪽에 취업한 근로자가 명절에 북쪽 고향에 한번 가려면 기차만 3일을 타고 가야 한다.(고속철 개통되면 하노이-호치민간 1천700km를 555분에 주파할 예정)


나는 추가로 종돈 사업을 하기로 하고 ’03년 7월 직원을 미리 보내(윤우식 소장) 어학연수를 시키는 한편, ’04년 7월 기존 한포크 농장 근처에 3만3천평을 평당 7천700원에 매입(50년 임대 조건)하고 12월에 다비-CJ(CJ-VINA에서 1/3 투자) 법인을 설립(자본금 $1,440,000) 하였다.


주변 일대는 월남전 때의 격전지로 알려졌으나 지금은 고무나무 재배단지여서 격리 조건도 좋고 한국에서는 늘 경사지에만 짓다가 거의 완전 평지에 돈사를 지으니 편리한 점도 많았다.


’05년 10월에는 다비육종에서 112두, 11월에는 영국 JSR에서 256두를 수입하였고 나중에 듀록 34두는 미국 Stein&Stewart 농장에서부터 인천공항을 거쳐 장거리 수송 끝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CP의 무서운 질주


베트남의 양돈 현황을 처음 접하였을 때의 느낌은 CP가 이 나라의 표준이구나 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농장 하는 사람들이 설계도 CP, 시설도, 사료도, 종돈도, 출하도, 컨설팅도, 자금도 모든 것이 CP것 뿐이었다. 사료 벌크 수송도 유일하게 CP만 하고 있었다. 

미국이나 유럽보다도 계열화 사업의 위력은 훨씬 강력해 보인다.

요즘 같은 불황에도 흑자를 내고 있고, 지금 175만두 규모를 2018년까지 일단 1천만두로 늘리고 그 다음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연수용 양돈장도 3군데나 되고 현대식 도축장은 물론 번식농장 규모는 모돈 1천200두, 2천400두 단위 분리사육 방식이고 이러한 독주는 베트남 뿐 아니라 옆의 캄보디아에서는 더 심하고, 이미 미얀마까지도 장악 하고 있다고 한다. 베트남 CP 외에 인도네시아 사료계열

쟈파나 태국 그린휘드, 프랑스계 회사도 계열화를 서두르고 있다.

 

열두번째 이야기 한국만으론 좁다…베트남으로(중)


산업 규모·잠재성 비해 인프라 열악…넘어야할 산 수두룩

현지 교수 등 초청 견학·장학금 후원…양돈 전문지 발간도


 

베트남 호치민 인근에 자리잡은 다비-CJ 종돈장 전경. 위 사진은 현지 농장을 점검하고 있는 윤희진 회장의 모습.

베트남 투자와 북한 종돈


나는 베트남 관련 기사나 책이 나오면 빠지지 않고 읽고 투자 설명회에도 나가고 한·베 친선협회에도 가입하여 하나라도 더 베트남에 대한 지식들을 알려고 열심히 쫓아다녔다.

 

우리 축산 박람회 때마다 베트남 현지의 교수, 공무원들을 초청하고 우리 회사 직원 연수를 시키는 것은 물론 ’04년 9월 수의 공무원 16명의 초청경비를 부담한 것을 포함, 매 2년마다 AAAP 교수 2명의 경비를 지원하고 있다.

 

호치민 대학을 포함하여 몇 군데에 장학금 지급 등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쏟고 있다. 아직 별로 알아주진 않으니 짝사랑이라고 해야 될 듯 하다.


희한한 일은 이렇게 산업규모가 큰데도 축산 관련 신문이나 잡지가 하나도 없고 사료업체 홍보지나 3개월에 한번 4페이지짜리 관보가 전부였다.

 

CTC 바이오에서 나가있는 정인서 사장과 상의 끝에 양돈 잡지를 발간하기로 하고 오랜 준비를 거쳐 창간에 성공, 지난 9월 ‘HEO’(베트남 말로 돼지라는 뜻) 창간 1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베트남 사료대리점 사장들은 양돈농가들이 너무 많이 알면 안되는데 하며 잡지 보내는 걸 꺼려한다.

P&P 우영제 사장이 현지까지 가서 지도해주고 많은 자료와 사진도 보내주고 있고, 거꾸로 한국 양돈장에 근무하는 베트남 노무자들 30여명이 그 잡지를 수입해다 보고 있다. 


질병대응 취약…진단센터 추진

질병검사를 믿고 맡길데도 없어 농람대(호치민 대학교 農林大)에 진단센터를 차리기로 하고 젊은 교수 Dr. Hai를 미네소타대 주한수 교수에게 한달가량 연수를 시킨 다음 현재 진단센터를 추진중에 있다. 강원대 한정희 수의대 학장이 여러차례 가서 지도해 주고 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2년전 호치민대 실습농장에 조그만 규모나마 양돈연수원을 차리려고 강원대 김경량 교수와 함께 ODA 자금을 신청했더니 기업이 하는걸 왜 도와주냐고 퇴짜 맞은 적이 있다. 한마디로 산업 인프라가 너무 안 되어 있다. 협회나 조합 같은 생산자 조직이 안 되어 있으니 하소연 할 데도 없고,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검역원, 방역본부, HACCP 인증, 등급판정, 종돈개량, 축산과학원 같은 지원 조직의 도움이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러고 보니 대한민국이 엄청 좋은 나라임에 틀림 없다. 또 세미나라도 할라치면 당국의 사전 집회 허가를 받아야 한다.


최근에는 PRRS가 전국을 휩쓸어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통계가 별로 없지만 15% 정도 사육두수가 준것 같다고 할 정도이다. 한동안 농장 PRRS 혈청검사를 하여 양성이면 출하금지를 시켜 버렸다.(농가에서는 우리 농장 샘플을 얻어다가 대신 내기도 한다.) 어디서 누가 제대로 검사 했는지도 모른다. 중국 계통 PRRS라고도 하고 강독이어서 우리나라와 달리 모돈 폐사도 많다. 농가에서 파묻기가 힘드니까 강에다 버리기도 한다. 성(省)간에 돼지 이동도 안되고 종돈 거래는 올 스톱이다. 더 고약한 것은 PRRS에 걸린 돼지고기를 먹으면 사람이 죽는다는 보도가 나가서 고기 소비가 확 줄었다는 사실이다.


그 동안 한포크 농장을 합병하여 이제 종돈 모돈 2천두가 넘는 회사가 되었으나 아직은 생산성도 낮고 무더위 외에 질병 차단이나 잦은 도난사고, 비싼 사료값(2년전 까지는 한국의 94% 수준이었으나 지금은 113%로 오히려 더 비싸졌다) 등 해결할 일이 너무나 많다.


힘들지만 누군가 도전해야 할 길

아직은 종돈 시장도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다. 요즘엔 석달에 한번씩이지만 저녁에 그 곳 농장 사택에 가서 누워 있으면 이 나이에 여기까지 와서 내가 왜 이 고생을 사서 하나 한심한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누군가 도전은 해 봐야 되지 않겠는가? 매스컴에서 관심도 갖고 가끔 소개도 해 주시는데 잠재력이 큰 시장이긴 하지만 길게 보지 않으면 결코 쉬운 일도 아니다. 어떻게든 사업도 성공시키고 우리의 경험을 전수해 주고 싶고, 전쟁으로 인한 빚을 조금이라도 갚고 싶은 것이 솔직한 희망이다.


열네번째 이야기 양돈연구회 태동과 협회 활동(상)


’76년 필자 등 발기인 15명 주축 ‘양돈실무자동호회’로 출발

세미나·심포지엄 등 활발…전문가 그룹 구심체 맥 이어가


’70년대 양돈업계에는 사람도 많지 않고 책, 잡지 등 자료도 별로 없어 전문지식이나 정보 등 모든 것이 궁금하고 아쉬운 시절이었다.

우리 업계를 떠난지는 오래되었지만 이규은씨(마니육종 상무 역임)가 주로 연락을 했던 것 같고 ’76년 3월 6일 ‘한국양돈실무자 동호회' 란 이름의 모임이 이규은, 연정웅, 윤희진, 홍문표, 이원씨 등 15명의 발기인으로 출범했다.


목적은 친목과 양돈기술경영에 관한 연찰, 정보 교류를 통한 자질 향상 및 양돈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그해 5월 16일 초대회장에 한백용(2000 GGP 대표, 대한양돈협회 전무 역임)씨, 부회장에 이규은씨를 각각 선출하고 격월로 1박 2일 정례회 및 세미나 모임을 가졌다. 공부가 끝나면 뒤풀이(?)가 이어져 마지막엔 한 회장이 돈을 모두 따서 경비에 쓰곤 했는데 여러 재주가 많고 좌중을 휘어잡는 장기가 있었다. 가족들도 으레 그 모임에 가면 1박을 하고 오는 것으로 양해했다.


제일종축농장 이예혁씨를 거쳐 ’79년 3월 1일부터 필자가 세번째 회장을 맡았고 그 다음은 정영철, 이근홍(캐나다 거주), 홍문표 사장 등의 순서로 이어졌다. 

필자가 회장을 맡은 동안 ’80년 10월 10일 여의도 전경련회관 3층 국제회의장에서 ‘80년대 한국양돈의 발전 방향' 이란 주제로 제1회 전국양돈세미나를 시작하게 됐다. 강사로는 당시 ㈜제일농장 윤도진 사장, 중앙대 김성훈 교수 등이 나왔는데 국제 회의장 아래 위층을 꽉 채울 정도로 전국에서 많은 양돈인들이 관심을 가져 주었다.

필자 역시 초보수준이지만 시설자동화에 대해 발표를 하기도 했다. 

’83년에는 필자의 친구이기도 한 대만 立大農畜의 王汝准 사장이 강사로 오기도 했다.


열심히 공부하고 발표했으며 ’76년 3월~’87년 3월까지 세미나 자료를 묶은 ‘실무양돈'을 9권 29호까지 발간했다. 가끔 정책 심포지엄을 열어 정부에 정책 건의를 하기도 했고 세미나와 함께 기자재 전시회도 열었는데 광고비는 연구회의 운영비 조달에 큰 보탬이 되기도 했다. 

’83년 10월 건국대에서 개최하려던 세미나가 정국 불안으로 집회 허가가 나지 않아 부득이 수원에 있는 서울 농대에서 전시회를 하던 도중 아웅산테러 뉴스를 듣기도 했다. 

’86년에는 전남 광주지역에서부터 제1회 지역양돈세미나를 시작하여, ’87년 대구를 거쳐 ’88년 부산에서는 제7회 ‘2000년대 양돈정책'을 주제로 당시 농림부 이인형 중소가축과장, 정치평론가 홍사덕씨 등이 강사로 초빙됐고 ’90년 세미나에서는 한창 거론되던 UR 대책에 신구범 축산국장이(당시 회장 황금영), ’91년에는 일본에서 이코마 선생이 나오기도 했다(회장 윤덕영).


하여간 양돈연구회는 늘 전문가 그룹의 구심점이었고 필자 역시 웬만큼 급한 일이 아니고선 연구회 일이라면 열심히 쫓아다녔다.

대한양돈협회에서 받아주질 않으니 더 그러했을 것이다. 

’87년 11월 (주)양돈연구사를 설립하고 ‘월간 양돈연구' 창간을 논의하는 저녁식사 자리에 얼마전 작고하신 전동용 양돈협회장께서 한백용 당시 협회 전무를 앞세우고 오셔서는 ‘월간양돈'이 나오고 있으니 발간작업을 중단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 외에 홍문표 회원이 부산 박철곤씨(부경양돈조합장 역임)와 함께 이인혁 부회장(제일종축 대표)을 양돈협회장으로 밀었다가 쫓겨난 일도 있고 반기업양돈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젊은 친구들이 맘에 안 들었던 것 같다. 

하여간 연구회 멤버 중에 한백용씨나 황금영씨 같은 적극적이고 리더십 있는 회원들이 많았는데 그 분이 너무 욕심이 많았는지 17년씩이나 장기집권 하는 바람에 전문가 그룹을 협회 발전에 활용하지 못한 점은 참으로 아쉽다.

 

’90년 말께에는 양돈회관 주식 매집건 등으로 양돈협회 지도부 정관희 대리(현 대전일보 서산지국장 겸 본사 편집 부국장) 등이 전 회장에게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다가 서초 경찰서에 구속된 적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명절이 다가오니 울고불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한 마음에 몇 사람이(해인농장 김의수 회장께서 소개하는) 대법관 출신 변호사를 찾아가기도 했지만 수임료가 높아 도저히 감당하기 어렵다고 했다.

마침 당시 인권변호사로 유명한 조영래 변호사와 용케 연결이 되어 황금영, 정영철, 그리고 필자까지 셋이서 500만원을 만들어 찾아갔더니 그분은 우리보고 나쁘다고 했다. “구멍가게 협회장도 10년이면 썩는데 왜 그리 오래 하게 하느냐"(우리가 시킨 것도 아닌데…)는 것이었다. 정관희 대리는 다음날 바로 풀려났고 지금도 가끔 소식을 전해오는데, 조 변호사는 ’90년 폐암으로 요절하여 안타깝게 만들었다.

 

열다섯번째 이야기 양돈연구회 태동과 협회 활동(하)


’05년 양돈대상 영광…상금에 자비 더 보태 연구기금 쾌척

김건태 회장 뜨거운 열정에 의기투합…자조금 입법 등 도와


양돈협회에 발을 들여 놓다

대한양돈협회는 다른 한편으로 검정소 운영이나 농장검정문제를 두고 건건이 종축개량협회와 대립하고 종돈장들에게도 검정소 출품 요구를 반 협박식으로 하기에 우리들이 의무 규정을 삭제시켜 버렸다.


돼지고기 일본 수출 촉진을 위하여 여러 사람이 한국육류수출협회를 조직하고 안 맡겠다는 김강식 회장을 겨우 모셔왔는데 (’93년 3월 창립총회) 여기에 또 제동을 걸어 겨우 법인회원만 가입하는 조건으로 12월 26일 허신행 장관 퇴임 직전에 가서야 설립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 하여간 이래저래 엇박자가 계속 될 수 밖에 없었다.


양돈연구회는 그 후 사단법인화 되어 이길재 의원이 ’94~’99년까지 회장을 맡았었고 지금도 유능하고 젊은 후배들이 계속 발전시켜 나오면서 전국양돈세미나도 이제 28회를 넘어섰다. 매년 양돈대상도 수여하고 있는데 ’05년 10월 고맙게도 필자에게 ‘한국양돈대상’과 상금 500만원을 주길래 여기에 1천만원을 더 보태서 ‘10년 후 한국양돈전망’에 관한 연구를 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조그만 기업도 중·장기 계획을 하는데 대한민국 양돈의 10년 후 전망과 발전대책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2020년 사육두수를 836만두로 추정하고 호당 1천204두, 1인당 돈육 소비 20.8kg을 예상하는 훌륭한 보고서가 나온 바 있다.


’98년 양돈협회 신임 회장으로 최상백 회장이 당선되자마자 미국 곡물협회에서 양돈시찰단을 파견하는 기회를 만들었다. 민병열 전무(현 대표)와 상의하여 팀을 짜면서 도드람 진길부 조합장과 갓 취임한 한영섭 조합장은 연배도 비슷하고 둘이 잘 해보라는 뜻으로 룸메이트로 엮어주기도 하고 최 회장과 약 2주간 미국 여행을 하게 되었다.


전에는 우리가 가면 NPPC(미국돈육생산자협회)에서 대환영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일본시장에서 경쟁자라고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그 후 최 회장을 H.C(돼지콜레라)박멸비상대책본부에서 본부장으로 모시고 일한적도 있고 연세에 비하면 건강하고 양돈 사랑도 넘치는 분이었다. 다음 회장 선거에서 김건태 회장 후보 출범식이 있던 날 정영철 박사와 필자가 찬조 연설을 했다. 결국 축산단체장 중 최연소 회장이 탄생한건 좋은데 필자보고 부회장을 맡으라는게 아닌가?


옆에서는 격에 안 어울린다고 만류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격식이나 체면을 따지기 보다는 의욕적으로 새로 시작하는 회장에게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았다. 단 1년만 하겠다고 했다. 김 회장은 여러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잘 해 주셨다. 학력이나 경력은 짧았지만 우선 사심이 없으니 적이 없고 주변사람들을 끌어 모아 내편으로 만드는 장기가 있었다(다른 단체에서 벤치마킹 할 정도). 필자도 팔레스 호텔 조찬모임에 여러 번 불려나가 즐거운 마음으로 밥값을 내곤 했다.


오래전부터 업계의 숙원이던 자조금 입법에도 성공했고, ’02년 1월에는 품목별 조합 연합회 추진위를 구성하여 도와주었으나 양돈조합 연합회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1년이 지난 후 내 후임으로는 이병모씨(진왕영농조합 대표)를 추천하였다. 이때까지는 필자와 잘 모르는 사이였으나 몇 분들에게 자문을 구한 결과인데 아마 지부장이나 도 협의회장을 안 거치고 바로 부회장으로 선임된 적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병모 부회장 역시 이번에 만장일치로 새 회장이 되었으니 사람은 제대로 추천한 것 아니겠나?


이제는 양돈협회 사무실에 가도 남의 집에 온 것처럼 쑥스럽지 않게 되었고 무슨 모금 같은 걸 하더라도 가장 먼저 내려고 애를 썼다. 

3년 전 일가재단 수상을 했을 때에도 상금 1만달러 중 절반은 운영이 어려운 성골롬방 수녀회에 내고 절반은 우리 업계를 대표하는 양돈협회에 기부한 바 있다.


최영열 회장 때는 박람회 추진위원장을 맡아 몇 달간 협회 직원들과 재미있게 같이 일 하다가 막판에 이익금 배분 문제로 최 회장과 서먹해진 적이 있었던 일은 뒤에 다시 언급하려고 한다.

 

협동조합 기능 충실…“UR시대 농가 등불되자” 출발

 

열여섯번째 이야기 도드람, 자생적 조합을 꿈꾸다(상)


필자 등 7명 사료공동구매 사업 시작…도드람 발기 모태

음성사료공장 감격적 가동…회원농가 큰 호응속 속속 합류


 

’92년 충북 음성에 도드람 사료공장 준공을 위한 상량식. 오른쪽부터 필자, 진길부 사장, 김대성 사장.

도드람의 태동

경기도 이천 소락 다방에서 무명회란 이름으로 모여 3년쯤 당시 현안을 고민하던 사람들과 함께 ’90년 7월, 무지개 사료 영업부장을 그만두고 이천으로 내려온 이범호씨에게 농장에만 있지 말고 빨리 전체가 살 방안을 강구하자고 재촉하여 진길부, 이명우, 윤희진, 김동식 등 7명이 사료공동구매를 시작한 것이 도드람 발기의 모태가 되었다. 이 당시의 정서는 양돈사료가격에 거품이 많이 끼어있다는 것과 UR 타결에 따른 위기의식 속에 협동조합이 제 역할을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나도 뭔가 돌파구를 찾고 싶어 중앙대 사회개발 대학원(대학원장 김성훈 교수) 협동조합 전공과정에 등록하였으나 기대하였던 것과는 달리 학위 받는 것 말고는 본질적인 문제에는 관심들이 적은 것 같아 도중에 그만두고 말았다.


나중에 김건호, 권순영 등이 합류하여 드디어 ’90년 10월 13명이 뜻을 같이하고 가칭 ‘이천양돈조합’ 간판을 달았으나 관에서는 뭐하러 따로 하느냐, 1도 1조합이 원칙이니 서울경기양돈조합으로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기존 조합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돈 장사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하는 수 없이 다음해 1월 자본금 5천만원으로 ㈜도드람을 설립하였다. 

사료공동구매에 따른 수수료로 여직원 1명과 지금은 유명 컨설턴트가 된 안기홍씨가 일본 어학연수에서 돌아오자마자 합류시켜 수기(手記)로 성적집계를 해가며 서로 비교, 토론을 이어갔다. 

최진호 박사를 통하여 사료공장을 하고 싶어하던 김대성씨를 소개받고 그의 서일산업과 합병하여 ㈜도드람 내에 사료사업부를 신설, ’92년 4월 사료공장 건설에 착수하였다. 

이때까지도 사료공장은 허가제였으나 농림부에서 회원농장용으로 특별히 승인을 해 준 것이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당시 이인형 사료초지과장이 이 건으로 김주호 사료협회장(전 농림부장관)으로부터 30분간을 시달렸다니 보통 소신 갖고는 하기 어려운 결단이었다. 죄송스럽기도 하고 두고두고 감사할 따름이다.


너 나 할 것 없이 자금 사정이 넉넉치 않아 출자는 사료비 한달치 기준으로 돈을 모았으나 공장을 짓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자본금 20억8천만원 중, 농가 지분은 3억5천만원으로 17%에 불과하였음) 나머지는 김대성 사장이 한미창업투자에서 13억원(지금은 ‘수조원 거부’로 소문난 우리나라 12번째 부자 이민주 회장이 대표), 나중에 산업은행에서 5억원을 끌어왔다. 지분은 적었으나 어떻게 농가 위주로 끌고 나갈 것인가가 큰 숙제여서 나와 이범호씨는 변호사 사무실도 찾아 다니고(이때 진길부씨는 농어민후계자 경기도 회장일로 바빴음) 나름대로 애썼으나 뾰족한 방법을 찾지는 못하였다. 


도드람 사료 준공

경기도내에는 공장허가가 어려워 제일 가까운 충북 음성에 부지를 마련하고 55억원을 투자하여 마침내 ’93년 3월 2일, 우리들의 투자로 결실을 맺은 공장이 준공되고 첫 출고는 감격적이었다. 공장 시설도 훌륭하고 오랫동안 품질에 대한 회원들의 평가는 아주 만족스러웠고 반면에 사료가격은 기대했던 대로 거품을 빼고도 꽤 이익을 낼 수 있었다. 김대성 사장이 관리를 잘 하고 배당도 적당히 해 주어 호응도를 높였다. 주변의 우량농장들이 계속 합류하니 다른 사료 쪽에서 불만이 클 수 밖에 없었다.


진길부(계열사업부), 김대성(사료), 이범호(유통), 윤희진(회장) 네사람은 매주 한차례 이천 미란다 호텔에서 아침밥 먹어가며 3~4시간씩 ‘UR 타결 이후 양돈농가 생존대책을 위한 자생적 농민조직’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끌고 갈 것인가 마라톤 회의를 거듭했다. 우리 회사 종돈판매를 담당하던 장성훈 부장(현 금보육종 대표)은 나에게 “제가 다비육종 직원입니까, 도드람 직원입니까?” 불평을 할 정도로 우리 직원들까지 독려해가면서 회원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도드람 회장 마지막해인 ’95년에는 벽시계 100개를 만들어 100개 회원 농장 방문계획을 하기도 했다


1998년 냉장육에 이어 국내 최초로 일본에 지육 수출. 오른쪽 세번째가 이범호 사장.


열일곱번째 이야기 도드람, 자생적 조합을 꿈꾸다(중)


“동태와 생태차이 아시죠” 자나 깨나 소비자 설득 ‘온힘’

냉장육시대 본격화·국내산 돈육 대외경쟁력 제고 계기 


‘도드람 포크’ 위대한 탄생

회원들의 안목을 넓히기 위해 우리보다 10년쯤 먼저 시작한 일본 최고의 양돈그룹인 GPF(글로벌 피그 팜)과 사이보꾸에도 가보고, 양돈 계열화 모델을 찾기 위하여 미국 동부의 카길 계열화 농장, 샌드 라이브스톡 등을 방문하였다. 또 하노버 VIV-EUROPE(지금은 EURO-TIER) 가는 길에 네덜란드의 HENDRIX 사료·종돈회사, CAWI 기자재, 동물복지 양돈장 등을 두루 둘러보았다.


’92년 우리회사 민동수(현 대표이사)가 연수 다녀온 바네벨트 대학(PTC+)에도 가보고 우리도 양돈연수원을 하자고 다짐했고 실제 ’96년 3월 이천에 도드람 양돈 연수원을 설립했다. 당시 사료빈은 모두 사료회사들이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우리는 제돈으로 설치하기로 했다.

 

‘힘을 모으자’는 슬로건 아래 뭉치자고 했고 일본에 수출하자고 역설했다. 모두 신나게 일했다. 

KBS TV에서 1시간짜리 도드람 소개 프로가 나갔고, 이때의 차형훈 PD(한경WOW TV 사장 역임)도 도드람 팬이 되었다. 농림부에서도 적극 밀어주고 축산국 간부들에게 도드람 소개 강의까지 하게 해 주었다.


’93년 1월부터 김홍표가 개발한 ‘DATA PIG’ 전산자료가 집계되어 회원농장끼리 번식 성적 비교가 되고 매월 등수가 나오니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99년 도드람 65농가 중 상위 30%, 17농가 평균 PSY 24.7두)


’92년 11월에는 도드람유통㈜를 설립, 그 당시 고기 유통의 메카라고 불리던 서울 마장동 지하에서 조그만 작업장으로 시작하였다. 

당시 돼지고기 부위를 속여 파는 것이 일반화 되어 있었는데, 곧이 곧대로 하다 보니 두 달 만에 자본금 5천만원을 거의 날리게 되었다. 판로가 없어 500g 포장육을 만들어 이범호씨가 살던 둔촌동 아파트 단지를 돌며 내외가 시식행사를 벌이고, 주문 받아 밤에 배달하는 그런 식이었다. 입소문이 퍼져 단지 내 대형 슈퍼에 처음으로 입점하게 되었다. 1년쯤 지나 다행히 정부로부터 양돈계열화 자금 지원을 받아 이천소재 신영도축장내에 제대로 된 가공장을 마련하여 ’93년 4월 ‘도드람 포크’를 출시하고 롯데백화점에 입점하게 되었는데, 크린포크, 하이포크와 더불어 이것이 국산 냉장육의 시초이다.


당시 수백 수천회의 시식행사를 하며 입이 아프게 하던 말이 “동태와 생태 차이 아시죠? 고기도 얼리지 않은 것이 맛있습니다" 였다. 이후 냉동육 시장은 급격히 냉장육 시장으로 바뀌게 되고 이 변화는 수입개방 이후 국내산 고기가 수입육과의 경쟁력을 갖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94년 3월부터는 일본수출을 개시하고 도드람 포크 품질 강화를 위해 PQA 위원회를 구성, 회원농가를 지정하고 4통(종돈, 사료, 관리, 유통 통일) 외에 농장 실명제 도입, 등급제 시행, 후기사료 급여, 180일령 이후 출하 등으로 일본에서도 선진크린포크와 함께 도드람포크는 알아주는 브랜드가 되었다.(’97년 일본 후생성 검역 면제, ’98년 냉장육에 이어 국내 최초로 지육 수출까지)


내가 살던 강남 대치동에 도드람 돈까스 1호점을 내게 되어 우리 가족은 물론 만나는 주변사람마다 데리고가 질리게 돈까스를 먹었다. 안성 LPC 선정을 위하여 정찬길 위원장(전 건국대 교수)을 찾아가기도 하고 안성시청 김제훈 축산과장과 도축장 부지를 찾아 다니기도 했다.


LPC 내 육가공 공장(바른터) 건설 중 IMF 사태로 수입 기계 값은 배가 오르고 외화 대출금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금융거래는 올스톱 되었다. 부도 위기에서 살려낸 것은 당시 주주로 참여했던 대한제당과 천하제일사료였다. 공장이 완공되자 일본 바이어들이 1년치를 독점하겠다고 서로 싸울 정도로 인기가 좋아 ’99년 950만불, 다음 해에는 3천만불 수출은 무난할 것이라고 꿈에 부풀었으나, 이어서 터진 구제역으로 모든 꿈은 사라졌다. 수출 물량도 반송되고 만들어 놓았던 제품들은 일본 수출가의 1/5 가격인 1달러(당시 환율 800원대)로 러시아에 1천여톤을 땡처리하게 되어 약 30억원의 손실을 입게 되었고 이범호씨에 대한 책임과 원성, 외부자본(이지바이오)이 들어오는 빌미가 되었다.

 

열여덟번째 이야기 도드람, 자생적 조합을 꿈꾸다(하)


성장하던 사료, 조합과 갈등으로 결별…유통부문 재매입

최선 다했지만 책임감…양돈인과 소원해진 관계 가슴아파


조합으로 전환

법인에서의 지분 구조상 한계가 있어 여러 검토 끝에 ’96년 2월 조합체제로 전환을 추진, ‘도드람 양돈축협’ 조합장에 진길부씨가 추대되었다. 나에게 초대 조합장(임기 1년)이라도 하고 넘겨달라고 했으나 나도 할만큼 했고, 회원 숫자가 많아지다 보니 말도 많고 해서 회장 일에 어느 정도 정이 떨어진 상태였다. 

나는 원래 조합보다는 기업에서 배워 온 사람이고 요새말로 ‘靜的인 사람’ 쪽이라 조합장 같은 자리는 별로 취향에 맞지 않았다. 나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언제든지 넘겨준다는게 내 소신이었다. 음성 사료공장은 월 2만6천t까지 풀가동을 하고도 모자라 인천 모 사료공장에서 OEM생산을 해서 음성공장을 거쳐 출고할 정도로 물량도 늘어났고 신뢰도도 높았다. 그러나 너무 잘 되는게 문제였다.


사료 쪽에서는 조합 운영비로 사료비의 3%를 주는게 너무 커 보였고 비 조합원 수수료 문제, 사료외상 등등 쟁점이 늘어나는데다 김대성, 진길부씨 두 대학동기간에 타협이 잘 안되었다. 김대성씨는 기업을 키워서 상장해서 투자 회수를 하는 것이 원래 목적이었던 것 같고, 우리는 농가들의 원가 절감과 계열화 사업 등 처음부터 목적이 달랐기 때문이다. 주변에 갈등을 부추기는 부류들이 있었고 조합원간에도 분열 조짐이 생겼다. 나중에는 조합장이 여주지검에 공금횡령 혐의로 고발되기도 하였다. (무혐의 판결) 

드디어 2000년 9월 2일 조합에서는 사료 전량에 대하여 별도의 OEM 생산을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도드람은 두쪽이 나서 하나는 도드람 B&F가 되고, 또 다른 한쪽은 껍데기만 남다시피한 도드람 조합을 추스려서 전남·북 조합을 합병하고(2003년 3월) LPC와 유통까지 거느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양돈조합으로 키운 것은 진길부 조합장의 뚝심과 리더십이 큰 몫을 한 것은 사실이다.

 

종돈의 경우 도드람조합원들의 대다수가 다비 종돈을 쓰고 있기도 하고 도드람포크의 품질 개선을 위하여 한동안 자진해서 종돈 두당 2만원씩을 조합에 납부한 때도 있었다. 그러나 조합원 중에 따로 종돈업을 하는 사람도 있고, 조합 실무 책임자가 바뀌다보니 어느 날 부터 다비 종돈이 아니어도 YLxD 3원교잡종이면 종돈 통일이라는 납득할 수 없는 논리를 내세우고 공식계약서는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더구나 별도의 A.I.센터까지 차리면서부터는 경쟁자가 되기도 하고 조합원들의 종돈 거래선이 되기도 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세월이 흘러 최근에 다시 조합과 종돈 공급에 관한 계약을 새로이 했으니 이제부터라도 앞으로 어려워질 여건 하에서 윈-윈 하는 관계로 발전하길 기대하고 있다. 

나는 잠깐 동안 자문위원장이란 이름을 걸기도 했었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조합과는 차츰 멀어졌으니 전임자, 후임자 사이가 좋기 힘든 것은 어느 조직이나 비슷한 모양이다. 유통의 이범호 사장마저 ’04년 도드람 유통을 이지바이오에 매각, 조합측에서 재 매입하는 와중에 떨어져 나와 ‘돈마루’를 차리고 다른 길을 가고 있다. 

나는 이상적인 계열화 조직을 꿈꾸고 도드람에 뛰어들어 최선을 다했지만 네 사람 중 제일 선배로서, 회장으로서 결국 뿔뿔이 흩어진데 대한 일단의 책임을 느낀다.


또, 가까웠던 많은 양돈인들과 도드람으로 인하여 오히려 소원해 진 것이 제일 가슴아픈 일이었다. 물 마실때 우물 판 사람 생각도 좀 해 주련만 세상사가 원래 그러려니 하고 넘기고 있다. 그 사이 한가지 재미있는 일은 도드람 사료에 창투사가 10% 이상 투자한 덕에 코스닥에 벤처기업으로 등록이 되어 있었고 ’99년 벤처 붐을 타고 주식값이 널뛰기 시작한 것이다. 주당 5천원짜리가 6월에는 3만원, 4만원대로 올라가니 대다수 농장주주들이 주식을 처분했고 좀 행동이 느렸던 이천의 박찬영 사장 같은 사람은 7만원에 넘기기도 했다. ‘도드람’에 투자하여 대개 6개월치 사료는 거저 먹인 셈이다.

 

 

열아홉번째 이야기 방역본부 전신 ‘HC 비대본’(상)


일본 수입돈육시장 주도권 잡기 호기…HC 근절 시급과제

재원 조성 모금운동에 김기용 회장 첫 2억원 쾌척 ‘기폭제’


 

돼지콜레라 박멸 없이 미래 없다

‘돼지콜레라박멸비상대책본부’의 주역은 당초 내가 아니었다. 석달 전 뜻을 같이하는 양돈산업 관련 22개 단체가 국회에 모여 돼지콜레라(이하 H.C.) 박멸 사업 추진에 합의하고 농어민신문사의 황민영 사장을 집행위원장으로 선임한 바 있었다. 가장 선결문제인 모금운동을 시작하였으나 업계에서는 신문사에서 돈을 내라고 하니까 일종의 압력으로 여겨서 상당한 반발이 있었기 때문에 1999년 7월 23일부로 부득이 내가 그 일을 떠안게 되었다.


 

당시에는 일본 돼지고기 수입 시장의 제일 큰 몫을 차지하고 있던 대만에서 ’97년 3월 전국적으로 구제역이 만연하여 380만두를 살처분하고 대만 양돈산업은 거의 붕괴되고 말았다. 우리 양돈업계로는 그야말로 위기이자 기회였으나 곧 일본이 H.C.백신 접종 중단을 예정하고 있어 우리도 빨리 접종중단 내지 박멸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실제 ’96년 3만t, ’97년 5만t, ’98~’99년에는 각각 8만t 이상, 금액으로는 연간 3억3천만불을 수출하므로서(도체중도 ’90년 당시 87kg에서 102kg으로 올라가고 품질 개선도 되고) 기대에 부풀만도 했었다. 소만호 축산국장을 찾아가 정부에서 ’96년부터 근절대책을 논의해왔으나 관(官)의 계통만으로는 어려우니 전체 양돈업계가 나서서 모금도 하고 박멸에 앞장서겠다고 하니 방역요원을 뽑아놓으면 나중에 신분보장 문제가 골치 아파질거라는 등 반응이 별로였다.


우선 대한양돈협회 최상백 회장을 상임본부장으로 하고 사무실도 없어 역삼동 양돈회관 내 협회 사무실 입구에 9평 정도 되는 임시 칸막이를 하고 최홍열씨를 사무국장에 선임하였다. 

이분은 농림부 방역과에 근무했던 경험을 살려 수의분야 전문성과 인맥 활용은 물론 행정적으로 본부가 제 궤도에 오를 때까지 일을 잘 처리해주었다. 


기부금 모금 동분서주

제일 시급한게 돈이어서 8월 10일 호소문을 내고 모금 캠페인을 벌이는 한편, 무더운 날씨에 서울시내고 지방이고 가릴 것 없이 사료업체부터 찾아 다녔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퓨리나 사료 김기용 회장이 가장 먼저 가장 큰 금액을 출연해 주었다. 2억원짜리 수표 한 장과 함께 진심어린 격려와 취지에 적극 동참하겠다는 말이 너무 고마웠고 일이 잘 풀릴 것 같았다. 기업체 오너도 아닌 분이 대단한 결단을 한 것이어서 나는 한동안 퓨리나 넥타이를 매고 다닌 적도 있다. 다음으로는 도드람 사료의 김대성 사장이 고맙게도 1억5천만원과 박동희 부장의 인건비까지 떠안아 주었다.


또 제일제당, 대한제당, 제일사료, 우성사료가 각 5천만원씩 대부분의 사료업체들이 참여해주었으나 다만 H사료 사장만큼은 전화하니 찾아 오지도 말라, 그래도 찾아갔더니 1시간 넘게 훈계조 얘기만 잔뜩 하고 결국 한푼도 안내고 말았다. 법정전염병은 정부가 할 일인데 쓸데없이 왜 나서느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


도드람조합을 포함 양돈업계는 물론 동물약품, 기자재 등 관련업계에서도 적극 호응해 힘을 보태주었다. 하여간 이렇게 해서 ’99년에 11억6천만원, 방역본부시절까지 1년7개월 동안 22억7천만원을 모을 수 있었다.


사실 정부에서 그해 예산으로 지원한 것은 방역복 등 기자재 8천300만원, 교육홍보비 2천700만원 등 고작 1억1천만원이 전부였다. 연말이 되어 협회 직원들은 보너스도 받고 선물도 받고 하는데 우리 직원들은 아무것도 없어 내 주머니를 털어서 해결하기도 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후임 김주수 축산국장(현 서울농수산공사 사장)이 전임자와는 달리 적극 지원해주는 것이었다.(나는 그때 일이 너무 고마워 이분이 4년 전 의성군수에 출마했을 때 현지에까지 지원 나간 일도 있었다)


수의사 출신 국회의원 이길재, 이우재 두 분도 많이 도와주셨고 재경위 정일영 의원은 공익성 기부금 대상 단체지정(손비인정)을 도와주었다. 예산협조를 위해 개인적으로 이완구 의원 등의 후원회에 가입하기도 하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하였고 다비육종에서도 모두 6천987만원을 내 놓았다

 

 

20번째 이야기 방역본부 전신 ‘HC 비대본’(중)


질병온상 용인지역, 옛 인맥들 도움으로 간신히 채혈

2000년 구제역 발생…현장가는 착잡한 심정 못잊어


도 단위 방역단장 회의 모습.

H.C.박멸에 매진

일선 시군 지역의 양돈농가 방역 지원을 강화하기 위하여 9월 1일까지 양돈농가 40호 이상 110개 시·군에 1~2명씩, 특별히 홍성군에는 3명의 요원을 배치하고 제주를 제외한 8개 도본부로 조직을 완료하였다. 충남대 수의대에 돼지콜레라(이하 H.C.) 방역단과 요원 152명을 모아놓고 교육을 하는 것으로 힘찬 첫 걸음을 시작하였다. 방역요원들은 대우도 시원찮고 신분이 보장된 것도 아닌데 모두 열심히 해 주었다.


본부에서는 각종 책자와 언론홍보, 2주 간격으로 활동 보고서를 배포하여 분위기를 잡아가고, 농림부에서는 항체가 검사결과에 따라 농가에 과태료를 부과하고 각 지자체별로 채혈 실적에 따라 정책자금을 차등 지원하는 등 독려하였다.(이 당시 15.3%는 접종을 전혀 안하고 26.2%는 1회 접종만 하는 실정이었음) 날이 갈수록 전국 양돈인들의 자구 노력과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암초를 만나게 되었으니 바로 축협중앙회였다. 이 때는 세상이 다 알다시피 농·축협 통합문제로 극도로 예민한 시기였지만 어쩔 수 없이 ’99년 8월 10일 신구범 회장을 방문하여 H.C. 박멸의 시급성과 절박한 사정을 설명하고 협조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신 회장은 축협에서 사무실과 모든 예산을 지원하고 축협의 전국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박멸을 할테니(협조는 안되고 축협이 주관해야) 비대본이 축협중앙회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이 당시 축협 도 본부에 가면 사무실 입구에 ‘농림부 직원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있을 정도로 농림부와 각을 세우고 있을 때인데, 농림부 협조 없이 H.C. 박멸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제안이었다. 

막후 조언자라고 하는 서경양돈조합 엄원섭 조합장을 찾아가 설득도 해 보았으나 막무가내였다. 축산국장도 역임하시고 개인적으로도 존경하는 분이어서 아무리 절박한 상황이지만 대범하게 방역만큼은 협조해 주실 줄 알았는데 매우 실망스러웠다. 이범섭 부회장이 차관실에서 약속한 3억원 출연 약속도 끝내 안지켜졌다.


본부의 방침은 기존 양돈 공동방역단과 H.C. 방역단을 일원화 하는 것이었는데 오히려 축협과 2원화가 되어 중복 채혈을 하는 경우까지 있어 지역축협이 주도하는 30개 시군 방역단은 11월 5일부터 본부지원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니 축협을 대표한 축산컨설팅부 윤충근 팀장과는 회의 때마다 건건이 부닥치고, 피차 피곤한 일이었다. 전국적으로 위험한 지역이 몇 군데 있었지만 특히 용인이 문제였다. 


용인에 집중

전국 최고의 밀집지역에다 임대농가가 많고 H.C. 5회 발생에 오제스키 병(ADV)의 소굴로 인식되고 있었다. 성낙신 축협조합장도 찾아보고 홍재구 양돈지부장에게 부탁하여 보았으나 도무지 나설 생각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옛날 자연농원 인맥을 찾아 이송록 회장 (현 양돈협회 이병석 팀장 부친), 강한구씨 등의 도움으로 포곡·모현 방역회를 먼저 조직하고 백암·원삼면 따로 용인을 세 지역으로 나누어 겨우겨우 ’99년 12월 1일~13일까지 채혈을 완료하였다. 

따져보니 ’99년에만 용인에 7번을 찾아갔었다. 

새해 들어 2000년 3월 15일에는 눈발이 날리는 쌀쌀한 날씨에 과천에서 전국 양돈인들이 모여 김성훈 장관 참석 하에 H.C. 근절 결의대회를 열어 박멸의지를 재삼 확인하기에 이른다. 


66년만에 구제역 발생

2000년 3월 27일 저녁 7시 농림부 차관보실에 모여 서규용 차관보, 김옥경 원장과 동승하여 파주로 가는 길은 마치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 같은 심정이었다. 

대책본부가 설립되어 H.C. 조기 근절을 위해 애쓴지 1년여가 될 무렵 66년 만에 구제역이 발생한 것이었다. 

겁도 나고 종돈장 하는 내가 거기 가도 되나 걱정이 앞섰다. 차단, 소독은 물론 살처분, 매몰작업과 함께 구제역 예방접종 방침이 정해졌다. 

물론 반대의견과 반발도 만만치 않았고 밤에 슬그머니 물으러 오는 사람도 있었다.

 

<계속>

 

 (축산신문 연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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