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대장정

손정도 목사

2014. 8. 15. 20:32 - 유라시아대장정

"우리나라가 잘 되려면 지방색을 가르는 파당싸움을 말아야 한다. 좁은 나라 한 핏줄의 겨레가 무슨 남도니 북도니, 호남이니, 영남이니 하며 네 갈래 열 갈래로 갈라져 싸우는가? 이는 나라를 잃고도 정신을 못 차리기 때문이다" 

-손정도 목사의 설교 중에서 -  



  1991년 재미교포의사 손원태 박사는 김일성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하였다. 십대를 형 아우로 지냈던 두 사람은 남북 분단으로 헤어졌다가 60년만에 백발이 되어 상봉하였다. 두 사람은 반세기가 넘게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고, 안부조차 전할 수 없는 세월을 살아왔다. 그들은 친형제같이 지냈던 중국 길림 시절을 떠올리며 어느덧 80이 되어버린 인생무상의 공허함을 달랬다고 한다.2006년 한국의 해군은 순수 국내 기술로 최신형 1800톤 급 잠수함을 건조하였다. 그 이름을 '손원일'함으로 명하였고, 해군제독 손원일의 업적을 기렸다. 손원일은 손원태 박사의 친형이다. 손원일은 해방 후 한국 해군을 창설하고, 대한민국 최초의 해군참모총장이 되었다. 그는 한국전쟁 동안 각종 전투에서 많은 공헌을 하였고, 전쟁 이후에는 국방장관을 역임하였다. 어떻게 김일성은 반공의 최전선에 섰으며 한국의 국방장관까지 지낸 손원일 장군의 동생을 평양으로 초청할 수 있었을까? 그 의문의 열쇠는 아버지 손정도 목사가 쥐고 있다. 


  손정도 목사는 1882년 평남 오흥리의 뿌리깊은 유교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났다. 그는 23세 때 과거 시험을 보러 평양을 가던 중 한 마을에서 조목사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를 통하여 회심하게 되었고, 상투를 자르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집안에서 미친 자식 취급을 받게 되었고 결국 집을 떠나 고학을 하며, 1908년 기독교학교인 숭실중학교를 졸업한다. 후에 그는 1910년 협성신학당(현 감리교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진남포교회의 목사로 부임하였다.손정도 목사는 1915년부터 1918년까지 감리교 최초 교회인 정동교회(현 정동제일교회) 담임으로 목회를 하였는데, 그 당시 교회를 2,300명이 출석하는 큰 교회로 부흥시키기도 했다. 또한 당시 남녀 교인석을 구분하기 위하여 설치했던 휘장을 없애고, 교회 안에 의자를 놓아 장안의 큰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손목사는 일제하의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나라사랑과 하나님사랑'을 강조하는 설교를 하였는데 그에 의해서 큰 감화와 감동을 받은 인물이 두 명이 일제하 독립운동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다. 모태신앙이었던 유관순은 이화학당시절 손정도 목사가 담임하던 정동교회를 2년간 다니면서, 그의 설교에서 하나님사랑과 나라사랑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품게 되었다. 유관순이 외쳤던 "대한독립 만세"는 손정도 목사가 뿌린 말씀의 씨앗이 자란 열매이다. 삼일절만 되면 우리들의 가슴에 떠오르는 유관순 열사의 간절한 나라 사랑의 기도가 그녀의 기념비에 이렇게 새겨져 있다."오오 하나님이시여,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 왜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은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 하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손정도 목사는 또한 청년 김일성에게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였다. 김일성이 청년시절 중국 길림에서 만주군벌에 잡혀 감옥에 있을 때, 손정도 목사와 그의 가족들은 김일성의 옥바라지를 해주었다. 손정도 목사의 노력으로 김일성은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는데 김일성은 그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손정도 목사를 "친아버지처럼 따르고 존경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김일성은 1931년 중국 길림에서 49세의 젊은 나이로 돌아가신 손정도 목사를 이렇게 회상한다."생전에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 속에 에워싸여 애국의 혼으로 그들을 열심히 교화시키던 목사일진대 고인과의 작별은 너무나도 조용하고 쓸쓸한 것이었다. 국부가 죽어도 마음대로 울지 못하는 세상이었으니."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손목사의 죽음을 일본 제국주의의 모살로 여기고 있다. 김일성이 '국부', '생명의 은인', '친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불렀던 손정도 목사는 1919년 이후 감리교에서 중국 및 러시아 지역 선교사로 파송되었으며,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국회의장)을 지내던 인물이다. 그는 대한적십자와 대한교육회를 창설하였는데, 손목사의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한국정부는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손정도 목사는 최근까지 한국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김일성은 자신이 죽던 1994년 '손정도 목사의 기념사업을 추진하라'는 유훈을 남겼고, 현재까지 그 관심이 지속되고 있다. 2001년 서영훈 전국무총리는 손정도 목사 후손들의 요청으로 '손정도 목사 기념사업회'를 발족하였다. 그리고 2003년 10월 평양에서는 손정도 목사 기념사업회, 감리교신학대학과 독립기념관 학자 등 남측 학자들과 북한 학자들이 함께 참여한 손정도 목사의 독립운동과 사상을 기념하는 학술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2007년 4월 한국 국가보훈처는 손정도 목사를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기도 했으며, 국회는 그에 대한 기념전시회를 개최하였다. 남과 북에서 목사로서 독립운동가로서 동시에 존경받고 있는 사람이 바로 손정도 목사이다. 손정도 목사는 2남 1녀를 두었는데, 큰아들이 국방부장관을 지낸 원일이고, 둘째 아들이 방북하여 김일성을 60년만에 만난 원태이다. 김일성이 1991년 손원태 박사를 초청했고, 김정일은 1994년 8월, 김일성의 조문 기간에 방북한 손원태 박사의 생일잔치를 평양에서 마련해주었다. 그 인연으로 손원일의 아들 손명원 쌍용회사 사장단은 1994년 12월 방북하기도 했다. 그 방북은 얼어붙어 있던 남과 북을 녹이는 봄의 시작을 알리는 발걸음이었다. 빌리 그래함 목사의 평양방문 때 김일성은 그에게 기도를 요청했고, 기도가 끝나자 '아멘'으로 받았다고 한다. 손정도 목사가 청년 김일성에게 나눠준 사랑이 빌리 그래함 목사를 통해 백발의 김일성에게 남아있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하나님의 사랑은 사마리아 땅이 되어버린 북한에 다시 소망을 품게 한다. 이미 세상을 떠난 손정도 목사는 우리에게 남과 북의 분단과 갈등을 풀어 가는 '사랑의 치유자'로 다시 자리매김 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나라사랑과 하나님사랑은 둘로 갈라진 남과 북을 하나로 되게 하는 씨앗이 된 것이다. 손정도 목사가 보여준 사랑은 큰아들 손원일이 묻힌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와 2004년에 사망한 작은아들 손원태 박사가 묻힌 평양 애국열사릉(국립묘지)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뛰어 넘어 여전히 빛나고 있다.


글쓴이: 최상한 집사, 남부플로리다한인연합감리교회 FL  schoi1@fau.edu  플로리다아틀란틱대학 행정학과 객원교수


손정도 목사와 도산 안창호 기독교 사회주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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