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대장정

대천덕 신부 (개신교 성공회 소속) 간증

2014. 3. 29. 13:55 - 유라시아대장정

대천덕 신부 (개신교 성공회 소속)  간증  

  
사실 저는 보통 사람들보다 고집이 센 편이므로, 저보다 더 완악한 사람은 흔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저의 신앙경험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실 수 있다면, 저 역시 간증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저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확신을 얻는데 2년 반 이상이 걸렸습니다. 

  
저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니 집안쪽으로는 제가 만일 침례교 목사가 되었다면 7대가 되었을 것이고, 아버지 집안쪽으로는 3대째 목사 집안입니다. 이러한 배경과 무관하게 제가 한가지 분명히 깨닫고 있는 것은, 자신이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 자신 확신이 없는 부분은 여러분께 얘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저는 사실 주님을 믿기는 하였지만 확신이 없었습니다. 부모님이 믿으셨기 때문에 따라서 믿었지요. 제 나이 다섯 살 때 -한국나이로 일곱 살 때- 어떤 할머니께서 저희 집을 방문해서 "얘, 너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니? 너도 아빠처럼 선교사가 될거니?"라고 물으시면, 저는 "예, 아마 그럴거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당시 제 친구들은 제각기 재미있는 장래 희망을 말하고는 했는데, 한 친구는 소방대장이 되겠다고 했고, 한 친구는 의사가 되겠다고 했고, 또 한 친구는 탐험가가 되겠다고 했고, 또 한 친구는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 숲속에서 살겠다고 했습니다. 친구들이 자신의 장래희망에 대해서 신나게 얘기할 때 저는 늘 "나는 그냥 선교사가 될래."라고 말했습니다. 

마침내 미국에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을 때, 목사나 선교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 다른 마음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대학을 다닐 때까지- 하나님이 정말 존재하시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으므로, 다른 사람에게도 전도 같은 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굳이 목사가 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다른 흥미로운 일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물리학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편이 훨씬 더 좋을 것 같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진리가 진리임이 입증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실험 과정을 거쳐 하나의 이론으로 정의되어야 합니다. 과학자들도 자신의 연구 결과를 인정받기 위해서 자신이 먼저 진리의 여부를 확인합니다. 물론 영적인 세계는 그보다 훨씬 더 어렵고 난해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제 안에 그것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생각은 하였지만, 만약 하나님의 존재가 입증되면 제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주님의 종'이 될 뿐이지요. 그렇다고 있지도 않은 것을 확인 과정도 없이 무작정 믿을 수도 없고, 만약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래서 그 분이 이 세상의 주인이라면, 그 분의 뜻대로 살지 않는 것은 정말 무모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재미있게 지내다가 나중에 지옥에서 영원히 살아야 한다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그래서 결국 이것을 확인해 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성경을 읽기 시작했는데, 특별히 두 구절이 저의 마음을 끌었습니다. 하나는 요한복음 14장 12절 말씀이었습니다. 이 구절은 사실 어릴 때부터 수백 번은 읽었는데, 왜냐하면 우리 집에서는 특별히 요한복음 14장을 많이 읽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더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문제는 제가 교회에서 이 성경말씀처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행하는 사람을 거의 볼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할아버지 -R.A.Torrey 1세; 세계적인 성령론의 대가-께서 병든 사람을 몇 번 고치는 것은 보았지만, 그 역시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도 제 기억으로는 두 번인가 세 번밖에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일도, 귀신을 쫓아내는 일도, 빵 다섯 덩어리를 가지고 5천 명의 신도를 먹이거나,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일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이 지나친 과장이나 거짓말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성경 말씀을 믿고 있으니, 이 사람들이야말로 거짓말쟁이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많은 목회자와 신자들이 성경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런 구절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저는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이 구절을 가지고 설교하는 말씀을 한 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설교하는 분들이 이 구절은 다 그냥 지나갑니다. 그래서 저는 어느 쪽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설교하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성경 말씀이 거짓인지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로 더 머리가 복잡해지기 전에 마음 먹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정말 계시다면, 제게 확신을 주십시오." 물론 이런 기도는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당장 하나님이 눈 앞에 나타나시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만, 마음속으로라도 확신을 주시기를 바랬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존재한다면 나라는 사람을 잘 아실 테고, 따라서 내가 어떤 과정을 거쳐야 확신하게 될지 나보다 더 잘 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도를 몇 번인가 하다가 이번에는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제가 주님께 청한 것이 있으니, 저도 당신께서 답을 주시도록 무엇인가 하겠습니다. 제가 매일 성경을 한 장씩 읽고, 간단한 기도도 하고, 교회도 나가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개인적인 노력이라기보다는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저는 당시에 장로 계통의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매일 채플이 1시간씩 있었어요. 저는 대학에 다니는 동안 약 1,200번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설교는 두어 개에 불과합니다. 한 번은 어떤 목사님이 자신이 마귀와 대화를 해보겠다고 하고는 잠시 후 마귀에게 무엇인가 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자신이 마귀 입장이 되어 대답하고, 또 다시 목사로 돌아와서 말을 하는 과정을 반복했는데, 흥미로웠던 것은 이 날의 언쟁에서 결국 마귀가 이겼다는 점입니다. 또 하나는 스코틀랜드에서 온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였습니다. 어떤 노처녀가 뉴욕에서 큰 배를 타고 영국으로 가는 중이었는데, 자신이 지낼 방을 확인하고 갑판에 올라가서 구경을 하다가 다시 돌아오는 과정에서 자신의 방을 찾지 못하고 당황합니다. 지금은 이해가 안될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큰 기선의 경우 비슷한 구조의 방이 보통 2천개 가까이 되었기 때문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요. 그래서 마침 지나가던 선원에게 자신의 방을 찾아 달라고 도움을 청하는데, 선원이 묻습니다. "혹시 그 방의 특징이 무엇인지 기억합니까?" 그런데 이 노처녀는 방 번호는 물론이고, 방이 몇 층에 있었는지도 기억을 못했습니다. "어쩌죠? 기억나는게 아무 것도 없어요. 아! 하나 있어요! 배가 항구를 떠나기 전에 방에서 창밖을 내다보았는데 정면에 자유의 여신상이 있었어요." 배가 항구를 떠난지 두 시간이 지났는데 그런 기억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튼 그런 일화를 가지고 설교를 하는데,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기도 응답을 기다리던 어느날, 또 한가지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정확히 어느 구절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한 전제 조건에 대한 암시를 주는 성경 말씀이었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찾다가 마침내 그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 가만히 이 구절을 음미하다가, 제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뜻을 알고 싶다고 하면서, 정작 주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내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만 있었습니다. 주님의 뜻을 일단 들어보고 할만하면 하고, 아니다 싶으면 안하겠다 그런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문제가 복잡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꿔 이번에는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만약 당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의심하는 저의 마음을 고치셔서 당신의 뜻대로 행하고자 하는 마음을 먼저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제가 당신의 뜻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제가 당신의 뜻을 따를 필요가 없는줄 압니다." 기도를 드리고 정확히 사흘 후에 이번에는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성경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던가? 만약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면,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거나, 고통을 받게 하거나, 이유 없이 시련을 겪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결론에 도달하자 제 안에서 주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조금씩 생겼습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만 있다면 할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한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저는 마음의 걸림 없이 '실험'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 뒤로도 매일 성경을 한 장씩 읽고 기도하는 일을 1년간 계속 하였습니다. 채플 시간에 별로 유익이 없는 설교를 매일 듣는 일도 반복되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제 안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1년 더 시험해보기로 하였습니다. 당시에 저는 교육학을 전공하였는데, 교육과 학생이 과학을 공부하는 것에 대해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였기 때문에, 전공인 교육학 외에도 다양한 과학 과목을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또 1년이 흘러갔고, 뚜렷하게 확인된 것은 없지만, 아무래도 하나님이 계신 것 같다라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1년을 더 실험하기로 하였습니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실험이 3년째에 접어든 것이지요. 3년간 실험을 계속하는 동안 -당시 저의 생활을 놓고 볼 때 그것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기억에 남을 만한 몇 가지 경험이 있었습니다. 당시 부모님은 옥스퍼드 그룹운동 -옥스포드 대학생들이 주축이 된 전도여행으로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과 아시아에까지 확산되었다- 사람들과 가깝게 교제하고 있었는데, 그 운동의 리더였던 프랭크 북 문(Frank Book Moon) 목사가 평소에 강조했던 것 중 하나가,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께 기도를 함으로써 그 날 해야 할 일에 대한 지도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의 조언에 자극을 받은 저는 그때부터 매일 새벽에 일어나 노트를 펼쳐놓고 그 날의 일과를 위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오늘 하루 제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십시오." 기도를 드린 후에 잠시 묵상을 하다가 떠오르는 생각들을 노트에 받아 적은 뒤, 더 이상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면 "주님, 감사합니다." 하고 펜을 놓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날은 펜을 놓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여러 가지 해야 할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을 다시 노트에 적다보면 어느 순간 내용이 너무 많아져서 그 날의 계획은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시행착오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감사기도를 드리고 펜을 놓은 이후의 계획은 무시해도 좋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얼마 후 저는 이 방법을 통하여 주님께서 저의 길을 인도하고 계시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경험은 저의 할아버지가 쓰신 <성령론>에 관한 책을 읽는 일이었습니다. 할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주님의 일을 하려고 하면 먼저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세례도 필요하지만, 주님의 일을 하는데 필요한 능력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세례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어떤 특별한 의식이나 영적인 체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으로 주님의 뜻을 받은 줄 믿고 행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본래 감화 감동을 믿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뚜렷한 감정의 변화나 감화 감동은 오히려 마귀에게서 비롯되기 쉽다고 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사람의 감정에 대해서 큰 의미를 두지 않으셨는데, 예레미야서 17장 9절 말씀에 근거한 생각이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사람은 본래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은 물론 스스로를 속이기도 쉽습니다. 그것은 제가 심리학 공부를 했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사람의 잠재의식에서 나오는 온갖 생각들에 모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는 성경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감정적인 감동이나 이해와 무관하게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누구든지 성령을 구하면 주시겠다"고 하신 성경말씀을 믿고, 머리로는 성령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정말 성령을 받았는지 실험을 해보자는 단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한편으로 매일 아침마다 기도를 통해 주님의 인도를 받고 있는 것이 바로 성령세례의 증거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매일 아침 하나님께 기도하고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몇 개월을 살던 어느날, 하나님이 분명 존재하시고, 내가 그동안 믿었던 하나님이 성경의 하나님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실험을 시작한지 3년째 되던 해의 일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은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작은 기적들을 끊임없이 보여주셨는데, 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반복해서 일어나자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되려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도무지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비로소 주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깨달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저의 흥미를 끌었던 과학 공부를 접고,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막상 신학공부를 시작하고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당시 부모님은 중국에 계셨고, 저만 홀로 떨어져서 미국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중학교 1년, 고등학교 4년, 대학교 5년, 신학대학 1년을 더해서 11년 동안 학교에 틀어박혀 책과 씨름하는 생활을 하다보니 거의 미쳐버릴 지경이었습니다. 당시에 심리학을 매우 깊이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점점 더 비현실적으로 되어갔고, 이러다가는 정말 '흰옷'을 입게 될지 모르겠다고 생각되어서 학교를 그만두고 노동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육체노동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보람있는 생활이었습니다. 노동을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경험할 수 있었는데, 제게는 매우 유익한 경험이었습니다. 방 얻을 돈이 없어 친구와 함께 캔디회사에서 빌린 창고에서 생활하기도 했는데, 재고로 남아있던 유통기한이 지난 캔디로 배를 채우기도 했습니다. 당시 저는 단 돈 50센트로 일주일 생활비를 감당해야 했기 때문에, 폐가가 되기 직전의 방을 얻어 살거나 제일 싼 음식만을 골라서 먹었습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아는 사람의 집에 초대받아서 식사다운 식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교회에서 청년 지도자로 활동했기 때문에 다행히 여러 가정에서 식사 초대를 해주었습니다. 교회 역시 넉넉한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에 사례비로 현금이 나오는 일은 거의 없었고, 대신 선물 같은 것을 주었습니다. 시골 교회의 경우는 사과나 복숭아 같은 과일이나 채소를 주어서 그것으로 식사를 해결하고는 했습니다. 

그런 생활도 더 이상 어려워졌기 때문에 정부에서 운영하는 직업소개소에 나가 일자리를 알아보았습니다. 육체노동의 대개는 흑인노동자를 선호했기 때문에 저는 번번이 헛걸음을 하고는 결국 싫어하는 일이지만 타자 시험을 보고 대학교에 사무원 자리를 알아보았더니 빈 자리가 없었습니다. 어느날 직업소개소에 갔다가 역시 헛탕을 치고 터벅터벅 걸어 나오는데, 저보다 더 처지가 어려운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나를 보더니 대뜸 "형제, 배가 고파서 그러니 좀 도와주지 않겠소?" 하는 것이었습니다. 수중에 있던 돈에서 일부를 그냥 내어줄 수도 있었지만, 혹 다른 데 사용할까 싶어서 "나도 마침 식사를 하려던 참이니 같이 식당에 가지요."라고 했더니 선뜻 따라왔습니다. 식당에서 제일 싼 음식을 시켜 식사를 한 뒤, 그가 직업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실업자라고 했더니 굉장히 미안해 하면서 자기가 아는 일자리가 하나 있는데 거기라도 좋다면 가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시청의 건설담당 책임자가 자기 친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믿기 어려웠지만, 어차피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일단 찾아가 보기로 하였습니다. 

시청내 임시사무실에서 비행장 건설에 필요한 업무를 추진하던 유에스 엔지니어(US Engineer) 사람들이 무슨 일로 왔냐고 물었습니다. 일자리를 찾는다고 했더니 '청사진을 판독할 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사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한다면 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겠다 싶어서 안다고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실제로 일을 시작했을 때 제가 그 일을 쉽게 해냈다는 것입니다. 3개월 정도 일하고 나니 보다 책임감을 필요로 하는 일이 맡겨졌습니다. 공사를 감리 감독하는 일이었는데, 제가 너무 꼼꼼하게 하다보니까 현장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실제 현장에서는 도면과 좀 다르더라도 대강 진행되는 분위기였는데, 제가 너무 원리원칙대로 해서 불만이었던 거지요. 얼마 후 결국 해고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비행기 격납고를 건축하는, 노동강도가 상당히 높은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다리도 없이 철강으로 된 골조 위를 원숭이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하는 일이었는데, 일하는 요령만 좀 생기면 해볼 만한 일 같았습니다. 책임자에게 견습공을 받느냐고 물었더니 야간 작업에 배정해 주었습니다. 그날 오후에 큰 렌치를 가지고 볼트 조이는 일을 4시간을 하고 나니, 그런 중노동이 없었습니다. 무거운 연장 때문에 손은 부어 오르고, 졸음은 쏟아지고, 다음날부터는 8시간씩 일해야 하는데,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이튿날 아침부터 점심 때까지 일을 하는데, 도무지 체력이 감당이 안되어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그만두어야 되나 생각하다가 주님께 기도를 했더니, "가만히 기다려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오후 작업시간이 되자 뜻밖에도 건축자재가 다 떨어져서 오후 작업은 쉰다는 것이었습니다. 할렐루야! 저는 바로 집으로 돌아와서 녹초가 된 몸을 누일 수 있었고, 이후로 몸이 차츰 단련이 되면서 계속해서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노동에 익숙해질 무렵 전쟁이 터졌습니다. 전쟁이 터지면서 하루 8시간의 노동이 12시간으로 늘어나고 쉬는 날도 없었습니다. 노동이 과중해지면서 개인적인 생활을 거의 할 수 없었고, 기도 역시 조금밖에 못했습니다. 얼마 후 정부 방침에 의해 군대에 입대하든지 신학교에 복학하든지 결정을 내려야 했기 때문에, 다시 신학교에 들어갔다가, 한 학기를 공부하고 친구의 소개로 선박회사에 일자리를 얻어, 제가 평소 기대하던 모험이 가득한 선원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중이었기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받는 고비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전쟁중에는 해군보다도 상선이 더 많은 피해를 입습니다. 한 배에 보통 스무 명 정도의 인원이 함께 생활하는데, 항해 중에는 거칠고 위험한 생활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한편으로 동료 선원들에게 전도를 하려고 했는데, 혼자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동역자를 얻으려 했지만 그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신학생 중에 나와 같은 뜻을 가진 이가 한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빈민가나 노동 현장에 나가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전도하자고 해도 모두 거절하고, 지식인이나 부유한 사람들만 선호했습니다. 노동자와 만나는 일 자체를 꺼려했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혼자 힘으로는 활발하게 전도할 수 없었습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온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전도활동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힘과 능력으로 하는 것입니다. 

얼마 후 선원생활을 정리하고 신학교에 복학해서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학업을 마친 뒤 개척교회 일을 시작했는데, 당시에는 장로교파의 교회법이 너무 완고해서 선교사로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뉴욕에 있는 장로교 선교부에 소속되어야 하고, 그곳에서 지급되는 월급을 받아야 했습니다. 할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허드슨 테일러의 경우 중국에 선교사로 나갈 때 장로교 선교부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어서 오직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도 경제적 어려움을 말하지 않고 모든 재정을 오직 주님께 의지했는데, 나중에는 기존 선교부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선교회를 운영하면서 활발한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러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저는 장로교 선교부에 찾아가 선교부에서 지급하는 월급을 받지 않고 오직 주님께 의지하여 나가고 싶다는 뜻을 전달했습니다. 제가 특별히 가고 싶었던 곳은 중국에서도 제일 서쪽에 있는 신강 지역으로, 러시아와 몽고에 인접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제안은 법적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거부되었습니다. 그런데 장로교 본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성공회 본부가 있었습니다. 누군가 성공회에 가보라고 했고, 성공회 선교부 부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푸에르토리코에서 선교활동을 한 분으로 저의 제안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대주교님을 만나도록 주선해 주었습니다. 대주교님과의 만남도 매우 긍정적이었는데, 성공회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융통성이 많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제가 장로교에서 성공회로 교파를 옮긴 이유입니다. 

성공회로 옮긴 뒤 미국 남부에서 흑인교회를 섬겼습니다. 남부에서는 지역적인 정서 때문에 흑인과 백인이 분리되어 예배를 드렸는데, 흑인들은 흑인신부보다 백인신부를 더 선호했습니다. 백인신부를 배경으로 몇 사람이 교회를 마음대로 휘두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인신부는 흑인의 실정을 잘 모르므로 대표를 자처하는 몇 사람의 의견을 따르기 쉽습니다. 그런 의도로 나를 돕던 흑인이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내게는 흑인 교인들의 의사를 대표하고, 교인들에게는 신부의 대리자 행세를 하고자 했습니다. 어느날 그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신부님, 교인들이 이 문제를 이렇게 처리하려고 합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그렇군요. 그럼 이 문제를 교인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결정하도록 하지요." "예?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당연히 신부님이 결정하셔야지요."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교인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결정하도록 합시다." 그랬더니 그의 얼굴이 굳어져 버려요. 얼마 뒤에 모임이 있었고, 그의 의견에 공감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흑인교회를 운영하면서 교회사역에 한계를 느낀 저는, 교회 일을 그만두고 정치에 참여하기로 하였습니다. 신부가 교회 관할 사제로서 정치에 관여할 수는 없었으므로, 평신도로서 건축 일을 하면서 흑인의 인권을 위한 정치투쟁을 벌여 나가기로 했습니다. 흑인 인권투쟁에 뛰어들면서 이 분야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흑인 인권문제의 근본적인 근간이 경제문제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경제문제를 바로 보지 못하면 사회문제를 이해할 수 없고, 사회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면 신학문제 역시 공허한 이론이 되기 쉽습니다. 

성경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가르침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과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신학교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에 대해서는 7년이나 가르치지만, 정작 이웃을 사랑하는 법에 대해서는 거의 가르치지 않습니다. 저는 사회법과 경제법을 깊이 있게 공부하면서, 마침내 성경적인 사회법과 경제법이 가장 합리적이고 실제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생산수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Land)입니다. 토지는 하나님의 창조물이지, 어느 한 국가나 단체, 개인이 소유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바로 토지의 소유주임을 자임하는 지주가 중심이 되는 사회입니다. 소수의 지주들이 방대한 토지를 독점하고 부동산투기를 조장함으로써 자신의 부를 극대화하는 한편, 다른 사람들이 토지를 이용해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공장을 지어서 상품을 생산해서 파는 것보다 부동산 투기와 임대 수입으로 더 많은 소득을 올릴 수 있다면, 누가 힘들여 공장을 짓겠습니까? 그 결과 일자리는 점점 더 줄어들고, 급기야 경제공황 같은 것이 발생합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지요.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바알 법입니다. '바알'은 '주인'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인은 누구입니까? 지주입니다. 바알 종교는 지주의 종교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히스기야 왕이 죽은 이후 70년 동안 바알 법 아래서 살다가 지주의 착취를 견디지 못하고, 요시야 왕때 다시 종교개혁을 통해 하나님의 법으로 돌아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진화되었다는 미국과 유럽을 봐도 여전히 바알법이 지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말씀을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경제법은 사악한 지주제도인 바알법을 따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에 관심이 없습니다. 바알법 아래서는 토지만 소유하고 있으면 일을 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부유해질 수 있습니다. 지주는 세력이 막강하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는 방법으로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지식인들조차 그들에게는 맥을 못춥니다. 지식인들이 성경을 조금만 깊이 공부해보면 현실의 모순을 금방 깨닫습니다. 그러나 앞에 나서서 말하는 법은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지주의 세력을 실감하기 때문입니다. 지주들은 풍부한 자본으로 지식인을 양성하기 위한 학교를 세우고,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단체를 설립합니다. 경제학 교수나 신학 교수들이 간혹 성경의 토지법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면 조용히 불러다가 압력을 넣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서조차 이 부분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신학에 대해서만 가르치고 공부합니다. 활자화된 이론만 가르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강한 열망을 갖고 있는 학생들도 결국 흥미를 잃고 평범한 신학생이 되고 맙니다. 남미의 해방신학이 나오게 된 배경도 여기에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사회의 모순과 그 해결 방법에 대해서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억압받는 민중의 해방기수를 자처하는 칼 마르크스 이론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그만두고 건축 일을 하면서 정치투쟁을 전개할 때만 해도 해방신학이 등장하기 전이었습니다. 당시 제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 바로 해방신학 사상과 같았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하나님의 토지법에 대해서 충분한 이해가 없었기 때문에, 사회문제를 성경과 연관시키지 못했습니다. 결국 목회도 실패하고, 정치활동에도 실패하여, 오랜 기간 교회 일을 맡지 못하는 결과만 빚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의 상황을 안스럽게 여긴 주교님이 공석중인 관할 사제직을 제안하면서, 한 가지 당부를 하였습니다. 교회 신도 중 하나가 매우 부유한 사람으로 그는 기업체의 사장이면서 동시에 지주였습니다. 그는 그 지방의 유지로 그 지역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그와 부딪치지 않도록 하라는 당부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저는 그 교구를 떠나 다른 교구로 옮겼습니다. 

그 즈음 저는 목회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고 신학교수나 선교사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를 언제쯤 신학교수나 선교사로 보내주시겠습니까? 제게는 목회가 맞지 않습니다." 북미에서 6년간 목회 일을 하면서 같은 기도를 드렸지만, 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여러 곳에서 좋은 대우와 조건이 제시되었지만 주님은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마침내 저는 이렇게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주님, 제가 하고 싶어하는 일을 허락치 않으신다면, 저로 하여금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십시오." 그제서야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왜 6년 전에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느냐?" 기도한지 3일만에 죽을 때까지 목회하고 싶은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뒤로 1년 동안 얼마나 흥미로운 일이 많았는지 모릅니다. 교육관을 크게 짓고 사제관을 말끔하게 수리했으며, 월급도 충분히 받게 되어 생활비로 어려움을 겪는 일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 1944년부터 12년 동안 목회하면서 매년 배를 타서 생활비를 감당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였으니 그 생활이 어떠했겠습니까? 이듬해 한국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성공회 신학교가 문을 닫은 상태인데, 한국에 와서 학교를 다시 열고 신학원장으로 취임해 달라는 제안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신학교수와 선교사에 대한 저의 소원을 동시에 들어주신 것입니다. 월급이 없어 생활은 다소 어렵겠지만, 저와 저의 가족은 망설임 없이 한국에 왔습니다. 

한국에서 신학원장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주님은 7년이라는 기한을 정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재임 6년 만에 갑자기 교단에서 사표를 요구했습니다. 저는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6년밖에 안되었습니다." "사표를 내라." "주님, 제게는 아내도 있고 자식도 있습니다. 먼 타국에서 6년을 살면서 돌아갈 여비도 없습니다. 어떻게 아내와 한마디 의논도 없이 사표를 냅니까?" "그 문제는 내가 해결할테니 너는 내 말대로 하거라." 할 수 없이 주님이 시키시는대로 사표를 냈습니다. 주교님은 이미 후임자까지도 정해 놓은 상태였는데, 사표를 받은 주교님은 지금 재학중인 학생들이 졸업할 때까지 1년만 더 맡아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7년 기한이 맞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까지 아내에게 차마 사표 얘기를 꺼낼 수가 없어 미적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내가 먼저 물었습니다. "당신, 사표 냈다는 말이 사실이예요?" 대답을 못하는 제게 아내는 달력을 가지고 와서 8월 며칠 날 자기도 동일한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날은 바로 제가 주님께 '사표를 내라'는 말을 들은 날이었습니다. 주님의 뜻임을 확신한 우리는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고, 신학교 퇴임 이후에 강원도 산골짜기로 들어가기로 결정했습니다. 

1965년, 우리는 강원도 산골짜기에 예수원(Jesus Abbey) 공동체를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제가 관여했던 항동교회 청년들 중 형제 네 사람과 자매 네 사람이 뜻을 함께 해서 우리 아이까지 열 두 명이 전기불도 안 들어오는 산골짜기에서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예수원은 이 열 두 사람을 위해 지은 집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주 식구만 63명입니다. -1988년 기준- 우사로 사용하던 베들레헴을 고쳐 사람이 살도록 하고, 이렇게 저렇게 해서 63명의 가족이 살고 있습니다. 지난 22년 동안 주님께서는 이 공동체를 위해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원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사도행전의 생활방식을 몸소 실천하는 한편, 성경공부를 통해 성경의 진리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기도생활을 통해 매일의 일과 가운데 주님의 뜻을 구하고 있습니다. 

지난 22년 동안 우리는 온전히 주님께 의지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특별히 재정에 있어서는 허드슨 테일러의 방식 그대로 모든 필요를 주님의 공급하심에 의지했고, 그 과정에서 주님의 놀라운 축복을 경험했습니다. 약 열흘 전에 예수원에 복잡한 재정 문제가 생겨서 방문한 손님들을 모두 내려보내고, 예수원 형제 자매만 모여서 3,000불이 채워지도록 기도한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예수원 통장에 3,600불이 들어온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 돈은 어느 한 사람이 기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여러 가지 명목으로 보낸 돈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돈은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송금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외부에 우리의 필요를 얘기한 바 없습니다. 재정 기도를 위해 손님들을 굳이 내려보낸 것도 그러한 방침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65장 24절 말씀 그대로 된 것입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주님께서는 매번 그렇게 응답하셨습니다. 우리는 지난 22년 동안 이와 같은 경험을 반복하면서 주님의 신실하심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월이 갈수록 그분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더욱더 확신하게 됩니다. 


출처: 예수원 홈페이지 

故 대천덕 신부(1918~2002)는 성공회(Anglican) 신부(혹은 목사라고도 함). 

예수원 설립자로 1957년 한국에서 사역을 시작, 45년간 한국과 한국 사람을 섬겨오다 2002년 8월 84세를 일기로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할아버지 R.A토리 1세로부터 시작된 성령론과 헨리 조지의 원리에 토대를 둔 경제이론 및 공동체에 관한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산 그의 삶의 본과 함께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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