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창세기 2:2절
너는 엿새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여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출애굽기 23:12
성서에서 하나님은 우리 사람들에게 로동을 하라고 명하셨다. 엿새동안은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는 꼭 쉬라고 명하셨다.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지음받은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과 꼭같이 하라고 명하신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 이후로 우리 인간은 수고 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수 있고 죽을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는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근 50년 사이 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얼굴에 땀을 흘리지 않아도 기계가 대신 수고하고 인간은 별 수고 하지 않아도 먹고살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어느 사회에서든지 로동이 완전히 정지되면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매일매일의 로동에 의해 공급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서로 다른 사회체제에서 살고있는 조선과 한국에서 어떻게 로동과 교육을 대하는지 먼저 살펴보자.
로동을 통한 교육의 역사
조선의 교육은 공산주의 건설의 ‘사상적 요새’를 점령하기 위한 기본적 수단으로서, 그 목적은 “사회와 인민을 위하여,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위하여 몸바쳐 투쟁하는 공산주의적 혁명인재”를 양성하는 것이라고 ‘사회주의교육에 관한 테제’를 통하여 천명했다. 조선은 맑스-레닌의 사상인 공산주의 사회를 꿈꾸며 세워진 나라이다. 조선에서 어떻게 로동을 통한 교육체계가 이루어졌는지 보려면 맑스와 레닌의 세계로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한다.
맑스는 자본주의 초기의 직업훈련에서 로동계급 자녀들을 위한 일반교육의 도입이라는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맑스에 의하면 사회주의 사회에서 교육은 “일정 년령 이상의 모든 아동을 위해 생산적 로동을 학업 및 체육에 결합시키는 것으로, 그것은 사회적 생산을 증대시키기 위한 한 방법일 뿐만 아니라, 전면적으로 발달한 인간을 육성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고 피력했다.
1910년대 말부터 1920년대까지 쏘련의 교육분야는 복합적 교육과정, 프로젝트학습법, 달턴 플랜을 포함하여, 미국의 진보주의 교육사조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는 다양한 교육과정과 교육방법에 대한 실험이 행해졌다. 이들은 시험, 숙제, 체벌 등의 폐지를 주장하였으며, 단순암기와 3R (읽기(Read), 쓰기(Write), 셈하기(Arithmetic) 련습도 부적합하다고 보았다. 과거의 전통적인 "책으로만 배우는 학교" 를 거부하고 아동의 경험과 흥미에 기반한 학습방법을 채택할 것을 주장했다.
1920년대에 이르기까지 쏘련의 교육 정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레닌의 부인인 크루프스카야 였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크루프스카야의 지도로 국가교육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후 2년간 교육에 관한 일련의 포고가 인민위원회 명의로 공표 되었다. 이중에는 사립학교의 국가 접수, 무상-의무교육 실시, 남녀공학, 등급매기기와 시험 철폐, 체벌과 강제숙제 금지 등의 급진적인 조치가 포함되었다. 1918년 10월에 공표된 포고 중 “학교 로동에 관한 원칙” 조항에서는 다음과 같이 생산로동과 교육의 결합을 명시하였다.
“생산로동은 학교생활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학교를 물질적으로 유지하는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교육의 한 방법이자 생산적이고 사회적으로 필요한 행위로서 학교생활의 기초를 이룬다. 그것은 교육과 긴밀하고도 체계적으로 연결되어야 하며, 지식의 불빛으로 주변 전체를 밝혀야만 한다. ...... 학교에서의 로동은 창조적이고 즐거우며 아동의 개성에 강제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고 또 계획적이고 사회적인 방식으로 조직되기 때문에 로동을 해야 한다는 원칙은 효과적인 교육방법이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학교는 학교 공동체가 되며, 학교공동체는 로동과정을 통해 주변세계의 생활과 밀접하게 그리고 조직적으로 연결된다.
크루프스카야에게 있어 교육과 로동의 결합은 “아동이 집에서 하는 로동을 뜻있고 흥미있게 하며 그들의 관찰력을 일깨워준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는 학교의 조직과 운영에 학생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생산과정을 조직하고 통제할 수 있는 로동자들을 교육하는 필수적인 첫걸음으로 생각하였다. 크루프스카야는 로동을 본래의 목적대로 활용한다면 아동의 정신적 발달을 촉진하는 강력한 지렛대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충족하여야 한다고 밝혔다.
첫째, 로동은 아동의 흥미를 끌어야 한다.
둘째, 로동은 아동이 습득한 지식과 기능을 적용하는 것이고, 육체적일 뿐 아니라 정신적이어야 한다.
셋재, 아동은 자기 로동의 결과와 그러한 로동에 자신이 유용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넷째, 아동로동은 학교 내에서 만이 아니라 학교 밖에서도 적용되어야 한다. 이는 일의 분야에서 사람들과 전면적으로 관계를 맺고 현실을 관찰하고 삶을 배우고 이럴적부터 이미 사회의 유용한 구성원이라는 자각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크룹스카야는 로동에 참가하는 것 자체가 학생들에게 내부로부터의 규율을 형성시킨다고 보았다. 규율은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의식의 결과가 되어야 하는 것이 중요하며, 로동과정을 통해 아동은 자신의 능력을 가늠하고, 시간을 배분하고 로동을 조직하는 것을 배움으로써 내부로부터의 규율을 싹틔울 수 있다고 보았다.
1958년 11월에 쏘련은 "학교와 실생활과의 연계를 강화하며 인민교육체계를 발전시킬데 대한 테제“를 발표하고, 곧 이어 12월에는 ’학교와 사회의 유대강화에 대한 시행령’을 공포하며, 8년간의 교육을 이수한 후 다양한 후기 중등교육기관에서 생산로동과 결합된 종합기술교육을 실시할 것과 대학 진학 전 최소 2년간 공장이나 집단농장에서의 로동경험을 의무화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학제 개정을 단행하였다. 새로운 교육체계의 목표는 학교와 삶과의 연계를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학생들에게 학문적 지식만이 아니라 로동을 위한 능력과 적합한 태도를 개발시키는 것을 의미하였다. 조선을 비롯한 후발 사회주의 국가에 도입된 종합기술교육은 이 시기 쏘련의 교육을 원형으로 하는 것이었다.
조선의 종합기술교육
조선에서는 해방 이후부터 쏘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교육-문화 교류를 통해 마카렌코의 종합기술교육 이론과 제도, 교육방법을 도입하였다. 조선에서는 1950년대 후반에 쏘련에서 진행되었던 교육개혁과 마찬가지로 로동과 교육을 결합시키는 방향에서 사회주의 국가들의 교육 제도와 교육 방법을 검토하고 도입하였다.
마카렌코가 체르친스키 공동체는 우크라이나 지방에 설립된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캠프로 일종의 교육과 생활의 공동체이다. 마케렌코는 1927년 말에 이 기관의 책임자로 취임하여 자신의 교육 원칙에 따라 이 기관을 운영하였다. 1932년에 체르킨스키 공동체는 3천여명의 청소년이 있었다. 이 공동체 생활의 기초는 생산로동이었다. 전체가 7-15명의 소집단으로 조직되어 하루 4시간씩 생산로동을 수행하였다. 모든 성원은 몇가지 분야의 숙련로동자로 훈련되었으며 중등학교 수준의 보통교육을 받았다.
조선의 종합기술교육은 세 가지 형태로 전개되었다. 첫째, 모든 일반교과교육과 기술교육을 결합하였다. 이는 수업주제를 생산 및 사회조직의 문제와 연결시켜 교육함을 의미한다. 협소한 직업기술교육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전 산업부문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기초적 기술과 이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자연과학을 비롯한 학문적 지식의 습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둘째, 종합기술교육 전담 교과를 설치하였다. 셋째, 로동을 직접적인 교육과정으로 편입하였다. 생산로동을 통한 교육은 학생들에게 생산에 필요한 실제적 기술 기능을 훈련하고 생산 관리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며 로동에 대한 사회주의적 태도로 교양하는 것을 교육 목적으로 삼았다. 1957년부터는 초급중학교에서 연간 30일, 고급중학교에서 40일간의 생산로동이 부과됨으로써 로동이 정규교육과정으로 채택되었다.
1977년 사회주의 교육에 관한 테제에서는 교육과 생산로동의 결합을 사회주의 교육의 방법 중 하나로 제시하고 있다.
“생산로동에서 유리되어 학업을 전문적으로 하는 학생들을 생산로동에 참가시키는 것은 그들을 혁명화, 로동계급화하여 교육의 질적 수준을 높이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학생들은 생산로동을 통하여 사상을 단련하고 로동계급의 혁명성과 조직성을 본받으며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공고히 하고 그 응용능력을 키우며 현실에 대한 체험과 로동에 대한 숙련을 쌓는다. 학생들을 생산로동에 참가시키는데서 교육학적 요구를 철저히 지켜야 한다. 교육 일변에만 치우치면서 생산로동을 소홀히 하는 경향과 학생들을 생산로동에 지나치게 많이 참가시키는 경향을 다같이 경계하여야 한다. 학생들의 생산로동은 교육교양에 도움이 되도록 합리적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그러나 1970년대를 경유하면서 생산실습을 교육적으로 조직하기 위한 물질적 기반이 취약해지고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기초기술 교육의 비중이 축소되면서 학문지향적 교육과정의 성격이 강해지게 된다. 로동을 통한 교육도 봄철 농번기에 1-2개월, 가을 추수기에 1개월 정도의 단순 로동의 형태로 교육적 의미와 분리된 채 나와있게 된다.
고등중학교에서 실시하는 생산로동은 학생들로 하여금 로동의 가치를 인식하도록 하고 현장실습 경험을 통해 미래의 직업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술과 태도를 함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초기에 조선은 로동과 교육의 결합을 통한 전면적으로 발달된 인간 양성이라는 종합기술교육을 지향하였다. 하지만 고등중학교에서 농촌동원의 형태로 실시되고 있지만 현재는 교육적 의미를 지니는 현장실습이 아니라 단순한 로동력 보충의 기능을 하고 있다. 교육이 매개되지 않은 단순로동은 조선의 교육이론에서 제시하는 학습 내용과 실천의 결합이라는 교육적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도 어느정도의 교육 효과는 있다고 볼수 있다.
봄철 농번기 1-2개월, 가을 추수기 1개월 로동은 한 개 학교가 한 개 리(지역단위)와 협력하여 농사일을 시작한다. 한 학급은 보통 40명정도로 이루어졌는데 한학급은 한 개 작업반(한 마을) 에 배치된다. 학생들은 4~5명 정도의 조로 10여명의 마을 주민 집에 체류한다. 식당으로 한 가정집을 정해서 40여명의 학생들은 함께 아침, 점심, 저녁 식사를 한다. 주방 보조로 신청한 학생들은 주방일만 하게 되고 나머지 학생들은 모두 옥수수 모내기와 벼 보내기 로동을 하게된다. 조선에서는 농약을 뿌리지 않으므로 모든 농작물들은 김매기를 해줘야 한다. 벼모내기가 다 끝날 때 즈음에는 옥수수 애벌 김매기를 시작하고 애벌 김매기를 마치면서 모든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간다. 가을에는 자신들이 심은 옥수수를 수확하러 같은 마을로 내려가서 1개월정도 로동을 한다.
공부만 하던 학생들이 농촌동원을 오면서 공동생활을 하게되고 농촌지역 주민들과 40일 넘는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지역사회를 이해하게 된다. 담당 교육자들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학생들은 그 속에서 공동체성을 배웠고, 우리가 하루도 섭취하지 않으면 안되는 농산물이 어떻게 땅에 뿌려지고 농민들의 땀방울이 배여서 수확되어지고 우리 입에까지 들어오는지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이렇게 사회주의사회에서 로동을 통한 교육이 이루어졌다면 자본주의 사회는 어떨가?
한국사회에서 청소년과 로동
“밖에서 땀 뻘뻘 흘리면서 일하는 저기 저 아저씨 보이지? 공부 열심히 안하면 나중에 커서 저렇게 되는 거야” 부모가 자식에 하는 말이다. 영화나 드라마는 물론 현실에서도 수없이 되풀이 되는 장면이다. “커서 저렇게 된다”는 말 속에는 많은 뜻이 담겨있다. “커서 저렇게 되지 말라”는 부모의 기대와는 달리, 청소년들 중 상당수는 이미 로동자다. 몸을 쓰는 일은 물론, 위험한 일들까지 청소년들은 오늘도 일하고 있다.
초기 자본주의 성장은 착취적인 청소년로동에 크게 빚지고 있으며 2차대전 이후 전후 복구 과정에서도, 식민지 착취의 과정에서도, 제3세계 근대화 과정에서도 청소년로동은 커다란 비율을 차지해 왔다. 자본주의 로동시장은 숙련된 정규 로동자들이 분포돼 있는 1차 로동시장과 저임금 미숙련의 불안정 로동자들이 분포돼 있는 2차 로동시장으로 이중화되어 있으며, 2차 로동시장은 대개 여성, 청소년, 이민자들로 구성되어 왔다. 청소년들은 산업사회의 예비인력으로서 존재하다가 산업구조의 변화와 가족의 생계 수준에 따라 로동시장으로의 진입과 후퇴를 지속적으로 반복하게 된다.
한국사회의 경우 근대화 과정에서 청소년 로동자들이 제조업 분야의 큰 로동력으로 자리잡아 왔으나, 제조업 분야의 후퇴와 교육열 팽창에 따라 198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해 왔다. 1980년대 후반 이후의 서비스산업의 팽창과 로동시장의 유연화는 청소년들을 다시 대거 로동시장으로 유인하는 구조적 원인이 되고 있다. 청소년들에게 문화상품의 소비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자기 나름의 생활양식을 구축해 나가는 중요한 행위로 자리잡고 있다. 이에 따라 단시간 로동(파트타임, 아르바이트)을 통해 소비를 위한 물적 기반을 확보하려는 욕구가 증가하고 있다. 나아가 학교와 공부가 청소년들의 의미세계에서 차지하는 정도가 축소되면서 학교밖 생활을 꿈꾸는 청소년들도 늘어나고 있다. 10대 청소년들에게 아르바이트 의미는 소비사회를 살아가며서 필요한 ‘돈’을 마련하는 행위이다. 즉 아르바이트(로동)는 소비사회가 요구하는 ‘소비 주체’로 자신을 형성시켜 가는 과정이라고 말할수 있다. 한국사회에서는 10대청소년들에게 ‘경험을 통해서 배워라’ 고 이야기 하지만 ‘경험은 하지만 배울수는 없는 조건’ 이 한국사회의 현실적 모순이다.
한국사회는 청소년의 로동과 교육을 명확히 분리하고 있다. 이것은 사회적 계층화 논리로 작용하는 로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전환을 가로막고 있다. 로동을 하는 것은 공부를 포기한 것이라는 사회적 통념이 한국사회에 명확히 존재한다. 기존의 사회인식의 맥락에서 제기되는 일자리 마련이라는 차원과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는 로동권과 학습권의 결합이라는 맥락에서 시도되는 지원시스템의 차이는 매우 크다.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특히 한국과 다르게 로동을 통한 교육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조선과 통일을 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이러한 구분의 논리는 적극적으로 극복되어야 한다. 통일을 준비하는 다음세대를 양육하기 위해 로동을 통한 경험과 과정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우리들의 숙제이다.
삼수령 목장의 북한 개방의 때를 준비하는 “로동학교”
예수원은 “로동이 기도요, 기도가 로동이다”라는 성 베네딕 수사장의 가르침에[각주:1] 근거하여 하루 세 차례 예배와 로동을 중심으로 기본 일과가 이루어지는 기독교 공동체이다. 이러한 예수원 정신에서 로동학교가 시작된 배경도 있지만 더 큰 배경은 통일을 준비하는 다음세대를 위해서이다. 조선은 로동자 농민의 나라이다. 그들에게 로동은 삶이고 교육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 5 ~ 8
로동자에게는 로동자로, 농민에게는 농민으로 다가가 친구가 되고 서로 사랑을 나누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2006년 1기 로동학교부터 2014년 8기 로동학교까지 참여하면서 내가 깨달은 것은 로동은 사랑이다. 로동학교에 참여하는 청소년들은 삼수령목장 공동체내에서 필요한 로동을 오전시간에 각 모둠별로 해야 한다. 8기 로동학교에는 함경북도 무산군, 량강도 대홍단군, 평안북도 정주군, 황해남도 장연군 모둠이 있었다. 모둠 이름을 함경북도 무산군, 량강도 대홍단군, 평안북도 정주군, 황해남도 장연군으로 실제 조선의 지역 명칭을 모둠 이름으로 달았는데 거기에도 깊은 뜻이 담겨있다. 일단 한국 청소년들은 조선에 대해서 깊은 이해가 없다. 지리적인 이해도 부족하다. 함경북도 무산군, 회령시, 온선군은 한국에 정착해 있는 70%가 넘는 탈북민들이 떠나온 고장이다. 그중에 한곳으로 무산군을 선택하였고, 대홍단군은 조선에서 감자농사로 유명한 곳이다. 평안북도 정주군은 우리나라의 민족지도자들을 많이 양성한 오산학교가 있었던 고장이다. 황해남도 장연군은 조선의 초대교회인 소래교회가 세워진 조선반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다. 참가자들은 자신들이 속한 모둠 이름의 정체성을 찾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지리적, 역사적 배움이 있었을 것이다.
8기 로동학교에서 주로 했던 로동은 목초지 잡목정리, 옥수수밭 김매기, 철조망제거, 풀뒤짚기, 우사 공구리 다지기 등이었다. 손에 물도 묻히지 않고 살아오던 10대 한국 청소년들에게 산속에서 풀뽑기와 톱질을 하며 땀을 흘리는 것은 너무나 익숙하지 않은 환경이다. 보통 8명의 모둠으로 이루어진 학생들에게 오전시간 9시부터 11시 30분까지 2시간 30분 가량 해야할 작업량이 주어졌고 참가자들은 카운슬러와 함께 모둠별로 함께 로동을 해야한다. 굳이 로동이 필요없고, 협동이 필요없이 자기앞에 놓여진 공부만 하면서 살아온 한국 청소년들에게는 다소 어려운 조건이었다. 뜨거운 땡볕에서 일하는 날도 있었고, 비가 내리는 날씨에도 로동은 멈추지 않았다. 삽질을 처음 해보는 14살 중학생, 곡괭이질과 톱질을 처음 해보는 여학생들에게는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시간이었다. 어떤 학생은 부모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이렇게 힘든 로동을 하고있다는것에 너무 감사하다고 고백했다. 또 어떤 학생은 건설현장을 지나가면서도 어떻게 집이 만들어 지는지 몰랐는데 모래와 자갈과 시멘트를 섞으면서 건설로동자들의 삶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힘든 조건에도 불구하고 참가자들은 열심히 자기들에게 맡겨진 미션을 완성하므로써 고단함과 성취감이 교차하는 묘한 순간을 느꼈다.
오후 프로그램중에서 가장 인상 남는 프로그램은 수요일 이루어진 “혁명가극”과 “믿어줘” 라는 신뢰게임이었다.
“혁명가극”은 조선에서 음악, 무용, 무대미술을 조합하여 혁명적인 주제를 극으로 풀어내는 예술의 한 형태를 말한다. “혁명가극”이라는 이름과 아이디어를 가지고 이번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참가자들이 스스로 기획하고 협동하고 소통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스킷(Skit)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 담당자로서 참가자들에게 4가지 가치를 주고자 하였다.
첫째, 조선의 삶과 문화를 학교에서 일방적으로 받는 가르침이 아닌 학생들 스스로 몸을 쓰고 몸을 부딪치면서 학생 주도적으로 배우는 것이다.
둘째, 혁명가극을 하면서 스스로 배우고 찾았던 소재들을 가지고 통일 이후에 북한 사람들과 서로 소통하고 이야기 할 것이다.
셋째, 혁명가극을 통하여 서로 협력하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넷째, 짧은 시간이지만 참가자들의 힘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창의성을 배울 수 있다.
이것은 Blooms-Taxonomy 교육이론을 사용한 것이다. Blooms-Taxonomy 교육이론은 암기하고(Remembering) 이해하고(Understanding) 적용하고(Applying) 분석하고(Analysing) 평가하고(Estimating) 결국에는 마지막에 무언가를 창조해내는(Creating) 교육이 진정한 배움을 줄 수 있는 교육이라고 본다.
또한 참가자들에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라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기에, 다양한 정보와 혁명가극을 진행 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주었다. 정보에는 각 조의 지역정보 그리고 그 지역과 관련된 역사적, 지리적 스토리를 담은 자료들, 가이드라인에는 가극에는 어떤 역할들이 있으며, 큰 주제를 정하는 방법, 스토리와 장면 그리고 대사를 만드는 방법을 소개해주었다.
스토리텔링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을 이해하는 방법은 Story와 Tell, 그리고 ing 로 나누어 보면 된다. 보이는 것 그대로 이야기와, 말하다, 그리고 현재진행형이라는 말이다. 이야기란, 과거 인쇄매체를 통한 이야기는 언제나 완료된 이야기다. “이야기되어진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구연(tell)’을 통해 청취자에게 전파해 나가고, 구연자와 청취자는 그 현장에서 함께 스토리를 공유했던 까닭에, 작가와 독자와의 관계보다 훨씬 직접적이었다. 청취자는 감동을 그대로 피드백 받았다. 바로 현재진행형(ing)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스토리텔링은 단순한 스토리의 전달이 아니라, 스토리를 기반으로 하는 공감과 소통을 의미한다.
스토리 구성에도 법칙이 있다.
스토리를 만들기 위한 정형화된 규칙이라는 것은 없다. 하지만 스토리를 이루는 핵심요소가 기반이 된다면 보다 탄탄한 스토리라인을 전개할 수 있다. 스토리를 구성하는 핵심요소는 바로 메시지와, 갈등, 등장인물, 그리고 플롯이다. 메시지는 분명하게 정의된 핵심 도구 내용으로 스토리 전반에 걸친 중심 테마를 의미한다. 갈등은 스토리의 흥미를 유도하며 조화를 깨트리는 역동적 변화, 스토리의 생명이다. 등장인물은 스토리를 만드는 주체자이며, 스토리 전개를 위한 행동을 만들어 나간다. 이런 구성요소로 만들어진 스토리의 전개과정을 플롯이라고 한다. 스토리의 배경과, 갈등, 결말이다. 이러한 구성요소는 소비자의 공감을 불러오는 기본 뼈대가 되어 보다 탄탄하고 전달력이 있는 스토리라인을 구성할 수 있게 도와준다.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시간은 참가자들이 큰 주제를 정하는 시간이었다. 큰 주제를 정하기 위해서 브레인스토밍을 소개해주었다. 참가자들이 생각나는 아이디어를 나눠준 포스트잇에 막 적고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 포스트잇을 다 붙이고 나서 서로 이야기를 통해서 아이디어 중에서 같이 분류할 수 있는 아이디어끼리 분류하고, 그에 따라서 스토리의 주제를 잡아갔다. 그런 과정 속에서 참가자들은 “내가 조선에 대해 아는 것이 없구나.” “뉴스나 신문에서는 조선에 대해서 많이 들었는데 내가 스스로 조선 문화와 삶을 찾은 적이 없구나.” 하는 것들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참가자들은 조선에 대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 고작 몇 단어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참가자들이 2시간 동안 기획하고 협력하고 연습하여 실제로 혁명가극을 무대에 올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 동안 참가자들이 조선에 대해 다양한 생각들을 하고, 그런 다양한 생각들을 한 주제로 모아서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한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었다. 정말로 누구도 생각지 못한 혁명가극들을 만들었다. 무산군 같은 경우는 혁명가극 도중에 노동 시간에 일하던 실제 철조망을 구해와 절단기로 잘랐고, 정주군은 오산학교를 세운 남강 이승훈의 스토리를 가지고 극을 올렸다.[각주:2] 대홍단군 같은 경우는 감자가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라는 특성을 이용해서 대홍단 왕감자에 대해서 재밌게 풀어내었고, 마지막으로 장연군 같은 경우는 소래 교회를 건립한 서상윤의[각주:3] 이야기를 현대 이야기에 맞게 각색해서 발표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3차에 걸쳐서 아이들이 다양한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의 경험을 통하여 참가자들은 조선에 대하여 스스로 공부할 수 있었고 스스로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믿어줘” 신뢰게임은 크게 팀원들과 함께하는 게임과 스스로 하는 게임으로 나뉜다. 먼저 팀원들과 함께 하는 신뢰게임에는 ‘사랑해! 믿어줘!’, ‘도전벽 넘기’, ‘인간 사다리’ 게임이 있다. 모두 서로의 믿음과 협동을 바탕으로 하는 신뢰게임이지만 그 중에 학생들의 마음을 가장 어렵게 하면서도, 서로에 대한 신뢰를 크게 확인할 수 있었던 ‘사랑해! 믿어줘!’ 게임에 대해 이야기 하겠다. 이 게임은 사람 키 정도의 높이에서 일어서서 뒤로 넘어질 때 나머지 팀원들이 받아주는 게임이다. 이 게임의 이름이 ‘사랑해! 믿어줘!’ 인 이유는 한 팀원이 올라가 뒤로 떨어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나머지 팀원들도 그 사람을 받아 줄 준비가 되면 이렇게 외치기 때문이다. “○○아 사랑해! 믿어줘!” 그러면 위에 올라선 학생이 두렵지만 믿음으로 몸을 맡기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협동을 하면서 성장하는 교육환경에서 자라지 않은 한국청소년들에게는 어려운 게임이었다. 어떤 학생은 도전하고 싶지만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10분 넘게 서있었고, 너무 속상해서 눈물까지 흘렸다. 다행히 참가자들은 오전 로동 시간을 통해 서로를 신뢰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제한된 공간에서 함께 잠자고 밥 먹으면서 공동생활을 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스스로 하는 신뢰게임은 눈을 안대로 가린 상태에서 줄을 잡고 산행을 하는 것이다. 단, 이 게임을 진행하는 과정에 있어서 어떤 게임이 준비 되었는지 카운슬러들은 대답해 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모두 안대를 쓰고, 알지 못함에서 비롯되는 두려움으로 산행을 마친다.
이 “믿어줘” 신뢰게임의 의미 부여에 정해진 틀은 없었다. 우리가 의미를 주지 않아도 아이들 스스로 느끼는 의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로그램 내내 이 게임을 우리가 왜 해야 하냐고 질문하는 아이는 한명도 없었다. 이 신뢰게임의 의미는 각 사람마다 달랐고 아이들은 아마도 스스로 의미부여를 했기 때문이다. 굳이 프로그램 기획자가 게임을 진행하면서, 조언을 들으면서, 느끼고 의미부여 한 바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우리는 “믿어줘” 신뢰게임에서 2가지의 신뢰를 생각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사람을 신뢰하는 것과 두 번째는 사람을 신뢰함으로써 알지 못하는 것을 신뢰하는 것이다. 첫 번째, 사람을 신뢰하는 것은 앞서 설명한 4개의 게임 모두를 통해 생각할 수 있으나 두 번째는, 스스로 하는 신뢰게임에서 아이들이 카운슬러를 신뢰함으로써 알지 못하는 줄을 믿고 산행하는 모습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중요한 두 가지 신뢰는 앞으로 아이들이 노동학교 밖으로 나아가 ‘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됨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알지 못하는 어떤 한분을 증거할 수 있다는 것’ 에 큰 바탕이 되기를 바란다.
로동학교는 실질적으로 다음세대가 통일을 준비할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다음세대 청소년들이 진정한 로동의 참뜻을 깨닫고 향후 남과 북이 하나되는 그때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가장 낮은자리에서 조선의 로동자들을 섬기는 귀한 주의종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박소명 inazirite@gmail.com
한동대학교에서 경제학와 국제지역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한국에 있는 조선 사람들에게 다양한 관심이 있습니다. 전문성과 관심을 가지고 통일시대에 조선 사람들과 남한 사람들을 연결하는 통로의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박요셉 genesis45v5@gmail.com
사회적기업가(Social Entrepreneur)로서 희년(Jubilee)정신을 통하여 북한 개방의 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탈북청소년 미디어교육, 다큐멘터리 제작, 문화컨텐츠 기획, 청년 사업가로 통일시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48장
매일의 육체노동에 대하여
1.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은 정해진 시간에 육체노동을 하고 또 정해진 시간에 성독(聖讀)을 할 것이다.
2. 따라서 우리는 이 두 가지 일들을 위한 시간은 이렇게 배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3. 즉, 부활절부터 10월 1일까지는 아침에 <제1시기도>를 끝낸 다음 제4시까지 필요한 노동을 하고,
4. 제4시부터 <제6시기도>를 바칠 때까지 독서에 전념할 것 이다.
5. <제6시기도> 후에 식사를 마치면 자기 침대에서 완전한 침묵중에 쉴 것이지만, 만일 누가 혼자 독서를 하고자 한다 면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할 것이다.
6. <제9시기도>는 좀 당겨서 제8시 반에 하고, 다시 <저녁기도>까 지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다.
7. 그러나 만일 지역의 필요성이나 가난함 때문에 직접 곡식을 추수해야 할 경우에라도 불만스러워하지 말 것이니,
8. 우리의 교부 들과 사도들처럼 자신의 손으로 노동함으로써 생활할 때 비로소 참다운 수도승들이 되기 때문이다.
9. 그러나 소심한 사람들 때문 에 모든 일을 적절하게 행할 것이다.
10. 10월 1일부터 사순절 시작까지는 제2시 끝까지 독서에 전념하고,
11. 제2시에 <제3시기도>를 바칠 것이다. 그리고 제9시 까지 모든 이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할 것이다. 12. 제9시를 (알리는) 첫번 신호가 울리면, 각자는 하던 일을 그치고 두번째 신호가 울릴 때까지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13. 식사 후에는 개인의 독서나 시편 (공부에) 전념할 것이다.
14. 사순절 동안에는 아침부터 제3시 끝까지 각자 독서에 전념하고, 제10시 끝까지 각자에게 맡겨진 일을 할 것이다.
15. 사순절 동 안 모든 이들은 각자 도서실에서 책들을 받아 차례대로 다 읽을 것인데
16. 이 책들은 사순절 첫날에 (나누어) 줄 것이다.
17. 특별히, 형제들이 독서에 전념하고 있는 시간에 한두 사람의 장로들에게 책임을 맡겨 수도원을 돌아다니게 하여,
18. 혹시라도 한가함이나 잡담에 빠져 독서에 힘쓰지 않음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무익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방해가 되는 게으른 형 제가 있는지 살피게 할 것이다.
19. 이런 자가 없어야 하겠지만, 만일 있거든 한두 번 책망하고,
20. 그래도 고치지 않거든 규정된 벌에 처하여 다른 이들이 두려워하게 할 것이다.
21. 그리고 형제들은 정해진 시간 외에 서로 교제하지 말 것이다.
22. 주일에도 여러 가지 직무를 맡은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든 이들은 독서에 전념할 것이다.
23. 만일 누가 너무나 무관심하고 게을러서 공부나 독서를 하려고 하지 않거나 할 수 없거든, 그런 사람에게는 할 일을 맡겨 놀지 못하게 할 것이다.
24. 병들거나 허약한 형제들에게는 한가하지도 않고 과도한 일에 짓눌려 도망치지 않을 정도의 일이나 기술을 맡길 것이다.
25. 그 들의 연약함을 고려하는 것은 아빠스가 할 일이다. [본문으로]
정주군 출신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이승훈, 이명룡, 김병조가 있고, 3.1운동의 모체가 된 이른바 48인 가운데 현상윤, 김도태, 김지환이 있다. 이 중에서 이승훈에 대한 그리고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알아보려고 한다.
남강이라고 불리는 이승훈은 독립운동의 선구자이자 개화기 우리나라 제 1의 거상이고 민족학교인 오산학교의 설립자이며 앞서 말했듯이 3.1운동 대표자 33인 중 한사람이다. 10세에 고아가 된 남강은 학업을 중단하고 보부상으로 장사를 시작하여 이후 유기공장 경영, 국제무역상, 운송 사업으로 재계의 1인자가 되었으나 ,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망국의 한을 느끼고 모든 일을 정리하여 은퇴하게 된다. 그 후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과 고종의 양위 사실을 듣자 그는 개인의 일보다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다가 그 해 7월 도산 안창호의 신민회조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깊은 공감을 얻고 민족을 위해서는 교육과 산업의 발전이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리고 동참을 약속하여 평안북도 책임자로 뽑혔으며 그 후 신민회에서 크게 활약하게 된다. 따라서 남강은 이러한 신민회의 정신 아래 1907년 12월 24일 평안북도 정주군에 중학교 과정인 오산학교를 창립하였다.
‘민족운동에 이바지하는 재목을 기르고 백성을 교육시키는 교사를 양성’할 목적으로 오산학교를 세운 뒤 남강은 학교의 시설과 살림을 갖추고 학교를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 밤낮 가리지 않고 활동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남강을 학교에 미친 사람이라고까지 하였다. 정말 학생들을 내 자식같이 사랑한다면 공익적 차원의 교육정신을 드높이 가다듬을 수 있도록, 남강에게서 많은 것들을 본받을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남강은 나라를 생각할 때마다 ‘교육과 산업’이라는 두 가지를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오산학교는 설립자인 남강의 실천궁행을 모범삼아, 오산정신과 남강의 교육정신에 의해 발전해 갔다.
오산학교의 교훈이 바로 남강의 정신 또는 교육사상인데, 이는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경(敬), 애(愛), 성(誠)’의 정신이다. 후 일 신앙인이 된 남강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스승을 공경하며 즉, 위대한 분을 경외하고 동경하여 본받고자 하는 지극한 마음씨를 갖는 것이 배우는 자의 첫째 과제라 하여 몸소 그의 교육정신을 실천함으로써 교 육적 영향력을 갖추게 되었고(경), 애의 정신은 먼저 남강의 혼이라고 도 일컬어지는 민족애와 나라사랑으로서 합방이 되어서도 끝끝내 고 국 땅을 지키고 독립 쟁취를 위한 교육 사업을 계속했으며, 그의 지극 한 학생사랑의 정은 학생들에게 주는 바른 교훈과 옳은 권유에서 볼 수 있었고 또, 학교사랑의 단면은 자기 재산을 모두 털어 바쳤다는 사실이 며(애), 진실하고 성실하게 거짓이 없이 살아감으로서 어려운 일을 내 가 먼저 행하고 타인까지도 이끌고 나아가자는 것(성)이 남강의 교육정 신이요 오산 정신인 것이다. 이 정신은 오늘날까지 오산학교의 교훈인 ‘사랑, 정성, 존경’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둘째, 민족운동의 인재 양성이다. 즉, 나라를 지킬 지도자를 길러 독 립을 쟁취하는데 교육의 목적을 둔 것이다. 이 사상은 후일 오산학교가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고 졸업생들이 그 핵심이 되었으며, 민족을 보 다 나은 국민으로 개조시키려는 그의 의지와 일치하고 있다. 그 당시 졸업생들의 현황을 살펴보면 일본 정부와 결탁되지 않으면 출세할 수 없었던 행정관리나 정치가는 없었던 대신 독립운동가, 교육자, 사상가, 종교인, 의사, 군인 등이 많은 것을 볼 때 그가 원했던 인재가 권력이나 재물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나라의 독립운동과 나라를 지키는 지도자 를 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많은 졸업생들이 그에 의해서 교사로 천거된 것은 민족운동에 쓸 인재 양성을 위한 그의 교육 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 산학교는 민족 간부 양성을 목표로 세워진 학교이므로 민족정신이 교 육의 소중한 줄기이었다. 이 민족정신은 단순한 민족 감정이 아니었다.
오산에서 가르친 민족정신은 어디까지나 민족의 영광을 바라보는 민족 정신, 내 자신의 덕과 지혜와 힘을 길러 나라에 봉사하자는 민족정신이 었다.
일제의 모진 압박 속에서 오로지 우리 민족의 혼을 일깨우고 지키면 서 민족의 영원한 혼이 충만된 인재양성에 모든 것을 다 바친 남강이야 말로 우리 민족의 참지도자요 영원한 스승의 귀감임을 새삼 느끼게 된 다. 조진석(1973: 81)은 오산학교 재학 중 가장 인상 깊은 선생의 가르 침은 졸업을 앞둔 학생들의 장래지도라고 말하면서 그 일화를 소개하 고 있다.
졸업식이 가까워질 무렵이면 선생께서는 졸업생 4,5명씩을 당신 사랑으로 오게 해서 침식을 같이 하면서 장래문제를 의논해주셨다. 선생께서,“너희들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과 지나칠 때, 그 사람이 남자일 때와 여자일 때 기분은 어떠냐?라고 농담을 하시면,“기분이 다르다”,“기분이 같다”는 등 학생들의 답변이 구구할 때,“그야 기 분이 다르지, 솔직해야 돼.”하시고선 그 밤의 담화가 본론으로 들어 간다.
남강 선생은 한 학생 한 학생을 유심히 바라보시면서, 내가 그 동 안 관찰한 바로 너는 이런 점은 고쳐야겠고, 이런 태도는 좋았다는 등 학생들의 성장과정을 면밀히 살피신 말씀과 아울러 내 생각으로 는 이런 직업이 네게 좋겠다는 등, 학생들의 장래문제, 우리나라가 처한 현 시국, 동서고금 성현들의 말씀 등 이러한 선생과 제자의 담 화는 겨울밤이 짧을 만큼 그칠 줄을 모른다. 밤이 이슥해지면 선생은 결론을 내리신다.
우리나라가 왜놈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은 첫째 우리 겨레가 무 식해서요, 둘째 우리나라의 경제력과 힘이 약해서야! 너희들은 왜놈 을 원망하기 전에 우리의 이 점을 잘 알고 장차 나라를 독립시켜야 해. 졸업 후에도 부지런히 배워서 우매한 겨레를 깨우치고, 이 나라 를 이끌어 가야 해. 현재 우리나라의 실정으로 보아 너희들은 목사나 교원이나 의사나 변호사가 되는 것이 좋아. 목사가 되어 우선 민중을 깨우치고, 교원이 되어 자라나는 어린이들을 훌륭한 인재로 기르고, 의사가 되어 무지와 가난으로 불쌍히 신음하는 겨레의 고통을 덜어 주고, 변호사가 되어 억울하게 누명쓰고 고생하는 겨레의 인권을 옹 호해 주어야 한다.”
끝으로 들려주신 이 말씀을 들을 때 우리들은 숙연해지고, 좌중의 학생들을 둘러보시며 손을 잡을 때, 우리들의 가슴 속에는 굳은 의지 가 용솟음쳤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도태를 비롯한 많은 인사가 교육자로 활약하였고 백인제 와 같이 의사로서, 주기철이나 한경직의 경우와 같이 목사가 된 이들, 그 모두가 다 남강의 애국하는 정신에서 나온 가르침의 결과이리라. 남강의 교육사상은 학문적 배경을 가진 정치한 이론은 없 다. 그러나 교육현장에서 그의 민족을 위한 헌신과 실천을 통한 솔선수 범 하는 모습은 어떤 이론적인 교육보다도 더 많은 감화를 주고 있다. 그의 교육사상은 우리 민족이 참사람의 그릇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가 르치는 것이 가장 우선이라 생각한 것이었으며, 깨달은 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정신이었다. 남강은 오산학교의 교훈으로 내려오는 ‘경. 애, 성’의 정신으로 민족이 개화되고 나아가 민족운동의 인재양성을 이루도록 그의 모든 교육적 열정을 쏟았다.
“겨레의 광복을 위해 힘쓰라. 내 유해는 땅에 묻지 말고 생리 표본을 만들어 학생들을 위하여 쓰게 하라.”는 유언을 받들어 영구를 경성 대학 부속병원으로 옮겨 생리표본으로 만들고자 해부하여 표본제작이 완성단계에 이르렀을 때, 총독부로부터 돌연 생리표본 허가가 취소되 었다. 총독부에서는 남강 정신을 두려워했던 터라 선생의 유해가 생리 표본으로 오산학교에 보존되면 산 남강 못지않게 생리 표본 된 남강이 더 두렵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리라. 오산학교는 일 제의 여러 가지 억압과 간섭 등의 악조건 속에서도 학생들에게 민족정 신에서 우러나오는 혼을 심어주어 수많은 애국지사와 민족의 역군, 독 립운동의 동량을 길러내었다. [본문으로]
로스와 맥킨타이어는 스코틀랜드에서 파송된 중국 선교사였다. 로스의 여동생과 맥킨타이가 결혼을 한 관계로서 처남 매부 지간이다. 그들은 조선이 대원군 집권 이래 쇄국정책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조선은 외국 선교사나 외국 종교를 받아 들이는 자는 사형을 시키는 법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먼저 성경을 번역하여 전하는 전략을 세웠다. 이른바 속인주의(屬人主義) 선교방식 곧 대인 선교방식이었다. 그래서 로스는 조선에서 나온 조선인을 접촉하려 했다. 당시 북경에는 만주인들과 고려인들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장소 곧 고려게이트가 있었다. 주로 만주인들은 약품과 비단을, 고려인은 홍삼을 거래했다. 로스는 그 곳에서 조선인을 접촉하려 했으나 조선인들은 그들과 접촉한 사실이 알려지면 내통죄를 면할 수 없었고 관념적으로 서양인을 짐승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접촉할 수 없었다. 로스가 1년을 노력했으나 만나지 못했다. 그 후에 맥킨타이어가 1년을 다니다가 이응찬을 만나게 되었다. 평안도 의주 출신으로서 식솔이 많았고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어 행상 장사를 하는 사람이었다. 맥킨타이어는 그에게 많은 사례비를 약속하고 한국어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이응찬은 내통죄로 잡혀 죽더라도 그 많은 돈을 한 번 벌어보기 위해 허락했다. 그런데 그는 500단어 정도 밖에 몰랐다. 후에 이응찬의 친구 서상윤이 중국에 장사를 하러 왔다. 서상윤이 장티프스에 걸려 한 주막에 거하게 되었다. 맥킨타이어가 그 이야기를 듣고 의사를 데리고 가서 계속 왕진하게 했고 맥킨타이어는 15일 동안 그를 떠나지 않고 간호를 했다. 감동을 받았다. 짐승에게 간호를 받는다는 것과 서양인에게 자신을 드려야 된다는 심성 때문에 갈등했다. 서상윤은 "어찌 그리 오랜 동안 생명 부지한 나를 위해 헌신하고 고통을 자초하느냐" "그런 긍휼 베풂이 당신이 갖고 있는 도 때문인 바 그 도에 대해서 나도 알고자 하노라" "나의 생명은 당신의 것이니 나를 가져다 요긴하다가 쓰라"고 했다. 서상윤은 보통 5,000단어 정도를 사용했다. 그래서 로스와 맥킨타이어는 서상윤에게 한국어를 배우고 한문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데 더 큰 힘을 얻었다. 그 후에 김진기, 백홍기 등도 들어와 번역사역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렇게 차려진 번역팀이 2년 동안 노력한 끝에 번역성경이 나오게 되었다. 번역죈 성경은 누가복음과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이었다. 서상윤은 번역 사역을 하는 동안 신앙이 생겨 세례를 받기를 희망했다. 로스가 그들의 위험 때문에 거절하지만 간청에 못 이겨 세례를 주었다. 서상윤은 번역된 성경을 한국에 들어가 전할 결심했다. 그는 스코트랜드성서공회와 대영성서공회로부터 권서전도인(책을 팔면서 전도하는 사람)으로 임명을 받고 조선국경수비대를 통과하기 위해 한쪽은 주역, 한쪽은 성경을 기록하여 가지고 들어왔다. 또한 그릇같은 물건을 싸는 종이로 가장하여 들어오기도 했다. 그리고는 그것을 다리미로 다리고 묶어서 밤새 필사했다. 한 번은 서상윤이 걸려 감옥에 가게 되었다. 감옥에 아는 사람이 풀어 주고 책은 암수했는데 그것을 보다가 베끼고 서상윤 갔다 준 다음에 그 책 읽고 전도자가 되기도 했다. 서상윤은 동생 서경조와 함께 고향 황해도 의주를 떠나 황해도 소래로 가서 전도를 했다. 그래서 그 곳에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1884년에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세워진 소래교회이다. 서상윤은 이후에 서울에 성서반포소 만들었다. 거기서 맥킨타이어가 인천으로 보낸 성경을 받아 판매했고. 행상인처럼 다니며 책을 팔면서 '예수젼'을 팔았고 그로 인하여 많은 신자가 생겼다. 그로 인해 서울에도 기독교 공동체가 생겨 1887년에 새문안교회가 세워졌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