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대장정

협동조합의 이해

2014. 1. 31. 13:46 - 유라시아대장정
협동조합의 이해

1단계 협동조합 운동

    협동조합운동은 노동조합운동이나 사회주의 운동과 마찬가지로 산업혁명기의 비인간적 노동조건과 짐승이나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당했던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태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700~1800년대 초반 영국에서 본격화된 산업혁명 시기에 인클로저로 인해 양 떼에게 경작지를 빼앗기고 농촌에서 쫓겨난 도시 노동자들의 상태는 참혹했다. 그들은 공장이나 광산 근처의 노동자 합숙소에서 생활하며 하루 16시간 이상의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다. 그러나 이보다 더 참혹한 상황은 만 7세부터 14세 이전 아동들의 노동이 공공연히 착취된 것이었다. 광산주나 공장주는 값싸고 통제 비용이 적게 드는 "유아 노동" 을 선호했다. 특히 광산주는 어링아이나 드나들 만한 폭의 좁은 갱도를 선호했는데, 이는 어른이 지나다닐 수 있는 큰 갱도에 비해 비용이 적게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광산주는 이렇게 좁게 만든 갱도에 어린아이를 내려보내 석탄이나 철광석을 캐게 했다.


   우리가 흔히 "기독교 사회주의자"라고 배운 로버트 오웬은 바로 이 시기에 영국에서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학교를 거의 다닌 적이 없었지만 젊은 시절부터 옷감 장사를 해서 꽤 많은 돈을 벌었다. 당시에 옷감 장사는 요즘으로 치면 "반도체 딜러"쯤에 해당하는 첨단 업종이었다. 그 시기 교양 있는 지식인들이 그랬듯이 그는 사회문제, 특히 노동자들의삶과 노동환경, 노동조건에 나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공장주가 노동자들을 비인간적인 노동환경으로 내몰지 않고는 공장 경영을 할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해 회의를 품었다. 

그가 시작한 뉴라나크 방적공장은 오늘날과 같은 전형적인 협동조합은 아니었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이고 놀라운 실험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방적 공장 사장 딸과 결혼하여 장인의 공장을 헐값에 넘겨받아 실험장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 공장의 이름이 바로 뉴라나크이다. 이 에서 그는 14세 이하의 어린 노동자들에게는 일을 시키지 않고 공장 안에 만들어 놓은 학교에서 공부하도록 했다. 그리고 14세에서 18세까지는 반나절만 일을 하고 나머지 반나절은 학교에서 공부하도록 했으며, 성인 노동자들에게는 하루 12시간 이상 노동을 시키지 않았다. (하루 평균 8시간 일해야 하는 지금 현실에서는? 악덕기업주) 이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이 생필품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도록 회사 안에 구판장을 만들었다. 사실 오늘날 한국의 근로기준법 기준으로 보면 아마도 오웬은 감옥에 가야 되는 악덕 기업주이지만, 당시 영국에서 뉴라나크는 꿈의 공장이었다. 영국을 비롯하여 유럽의 지식인들 가운데 이 공장을 방문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지금의 몬드라곤보다 당시의 뉴라나크가 훨씬 더 유명한 곳이었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방문자들은 이 공장을 견학한 뒤 한결같이 "아니, 이렇게 경영하면서 어떻게 이 회사가 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다.

뉴라나크는 전형적인 협동조합은 아니었지만 협동조합 연구자들은 이곳에서 협동조합의 씨앗이 잉태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노동자를 가족처럼 대하는 회사" 였으며 협동조합은 바로 이러한 휴머니즘을 뿌리로 두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잉여가치 생산의 담지자 노동자계급이 단결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이것을 지렛대로 모든 공장을 노동자들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과학적 사회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오언의 뉴라나크는 매우 한심하고 제한적이며 공상적인 실험이었다. 하지만 정권을 장악하기 전에 노동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계속 사우는 것밖에 없는가? 다른 대안은 없는 것인가? 혹은 노동자계급이 정권을 잡은 후에도 모든 공장에서 노동자들은 인간적인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사회주의 국영기업을 70여 년 경험해본 지금 시점에서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이 "아니오"라는 것은 분명한다.

1단계 협동조합운동은 휴머니즘에 기반한 실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뉴라나크의 성공 사례는 유럽 전역으로 번져나갔고 전투적인 노동조합운동 과정에서 벌어진 공장접수운동과도 결합했다. 노동자들은 정권을 장악하기 이전이라도 여기저기서 '인간적인 회사"들을 만들어나가고자 했다. 하지만 이러한 실험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속에서 일종의 고립된 섬에 불과했고 오래 지속되기도 힘들었다. 

2단계 협동조합 운동

1800년대 중반에 이르러 노동자들은 노동자 합숙소에서 벗어나 가정을 꾸리고 노동자 밀집 지구에 모여 살게 되엇다. 노동자 가족들에게 가장 심각한 생활상의 문제는 생필품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생필품 시장에서 소비자는 "왕"을 넘어 "황제"이고 기업들의 마케팅 구호가 "고객만족"을 넘어 "고객 혼절"로 접어들었지만, 당시의 생필품 시장은 공급자 중심의 시장이었다. 구매력이 약한 노동자 가족들에게 매일 필요한 양초와 소금, 땔감과 설탕은 가격이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 이상한 물건이었다. 심지어 물건이 없는 날도 허다했다. 따라서 수입이 한정된 노동자 가족들에게 생필품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1844년 영국 랭커셔 지방 로치데일의 노동자 가장들은 이 문제에 집단적으로 대응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들은 30여 가구를 모아 돈을 모으고 그 돈으로 가게를 차렸다. 이 가게에서는 출자금을 낸 조합원들만 물건을 구입할 수 있었는데, 다른 가게들에 비해 훨씬 안정적이고 저렴한 가격에 공급받을 수 있었다. 또한 노동자 한 가구의 구매력과 비교해 30여 가구의 구매력은 물건을 공급하는 기업과의 협상에서 매우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로치데일 소비자 협동조합은 전형적인 협동조합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로치데일 이전에도 생필품 구판장이 많은 지역에서 만들어졌지만, 대부분 성공하지 못했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연말에 장사를 다하고 난 뒤 남은 잉여금을 어떻게 분배할까였다. 어느 곳이나 잉여금의 분배를 둘러싸고 예외없이 심각한 갈등이 벌어졌다. 로치데일 소비자협동조합은 최초로 이 문제를 "이용 고배당의 원칙"으로 해결했다. 

"가게에서 물건을 많이 구입한 조합원에게 잉여금을 더 많이 분배한다" 는 원칙을 세운 것이다.

이 간단한 원칙은 지금 모든 협동조합에서 당연한 원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이 원칙을 처음 만들어낸 1870년대 로치데일 소비자협동조합운동가들에게는 엄청난 명성을 안겨주었다. 산업혁명기 유럽 어디에서나 노동자 밀집 지역의 노동자 가족들에게는 생필품의 안정적 공급이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이를 해결한 로치데일 소비자협동조합의 사례는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0년 단위로 수천 개의 소비자협동조합이 유럽 전역에 만들어졌고 협동조합운동도 전 유럽으로 번져나갔다.

신용협동조합운동이 시작된 곳은 19세기 후반 프로이센의 농촌 지역이었다. 프로이센 지역은 유럽의 다른 지역보다 농지개혁이 빨리 이루어져 소작농보다 자영농의 비중이 상당히 높았다. 라이파이젠은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농촌활동가였는데, 농민들이 열심히 농사를 지음에도 불구하고 늘 가난하게 사는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는 몇 년을 연구한 끝에, 그것이 고율의 이자를 받는 고리대금업 구조에서 비롯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즉 당시 농민들은 봄에 비싼 이자를 물어야 하는 데도 돈을 빌릴 수밖에 없고, 그 돈으로 가을걷이 때까지 농사지으며 생활하다가, 막상 수확을 끝내고 나면 자신이 갖는 것은 없고 수확물의 거의 모두를 원금과 이자로 갚아야 했던 것이다. 이런 악순환이 매년 되풀이 되었다.


라이파이젠은 농민들을 설득하여 신용협동조합을 만들고 여유가 있는 대농들에게는 많이, 중농과 빈농들에게는 조금씩 돈을 내게 했다. 그리고 가난한 농민들부터 순위를 정해놓고 고리대금업자들이 받는 이자보다 훨씬 낮은 금리로 봄에 돈을 빌려주었다. 그 다음 해에는 순서에 따라 또 다른 농민에게 돈을 빌려주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이 방식은 놀라운 결과를 나타냈다. 농민들이 고리대금업자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출로를 찾게 된 것이다. 그것도 자신들의 힘으로!!!!!!!!!!!!!!

로치데일 소비자협동조합운동과 마찬가지로 라이파이젠 신용협동조합운동도 유럽 각자의 농촌으로 확대되었다. 독일의 도시 지역에서도 소상공인들이 모여 만든 신용협동조합을 슐체계 신용협동조합이라 부르는데, 이 이름은 신용협동조합운동을 주도한 국회의원 슐체 델리취를 기려 따온 것이다. 우리나라의 신용협동조합은 라이파이젠 계열이다.

프로이센과 덴마크에서는 가을걷이가 끝난 뒤 농민들이 그 농산물을 중간업자에게 싼값에 넘기지 않고, 대신 스스로 돈을 모아 구판장을 만들고 거기서 직접 팔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당연히 농민들은 중간업자에게 넘기는 것보다 훨신 많은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농업혇오조합운동이 시작되었다. 배를 가진 선주들은 자신들이 잡아온 물고기를 직접 팔기 위해 구판장을 만들었는데, 이로부터 수산업협동조합이 시작되었다. 산을 가진 산주인들도 임업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협동조합운동이 확산되었다.

프랑스 남부 지역과 스페인, 이탈리아 등 남유럽에서는 생디칼리즘 전통에 기반하여 노동자들의 공장접수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이 운동이 노동자 생산협동조합으로 확대되었다. 20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주택협동조합이나 보건협동조합과 같은 서비스협동조합들도 생겨나기 시작하여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2단계 협동조합운동은 유럽을 넘어 점차 전 지구로 퍼져나갔다. 현재 세계인구 70억 명에서 경제활동인구는 약 45억 명으로 추산된다. 이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20억 명 정도가 어떤 식으로든 각종 협동조합의 조합원으로 등록되어 있다. 이는 협동조합운동이 갖는 보편성에 기인한다. 경제활동이 일어나고 사람들의 공동적 필요가 생겨나는 그 모든 지점에서 협동조합이 조직될 수 있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경제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 때 협동조합은 좋은 "그릇"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것이다.

3단계 협동조합운동

1895년 전 세계 협동조합운동가들이 모여 국제협동조하연맹(ICA)을 조직했다. 물론 몬드라곤도 이 연맹에 가입되어 있다. 3년마다 열리는 국제협동조합연맹 총회는 협동조합운동의 전반적인 방향에 대해 토의하고 협동조합 정신을 되새기는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1980년 제 27차 총회에서는 세계 협동조합운동에서 주목할 만한 주제 발표가 있었다. 일명 "레이드로 보고서" 로 알려진 보고서가 여기서 발표된 것이다. 이것은 캐나다 협동조합중앙회 총장 출신의 레이드로 박사가 연맹의 청탁을 받아 집필한 "서기 2000년의 협동조합" 이라는 이름의 보고서였다. 그가 제출한 보고서는 세계 협동조합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지난 100여 년간의 협동조합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즉 협동조합운동의 보편성과 함께 그것이 절대적 빈곤을 완화시키고 민주주의의 성장에 기여한 측면이 크지만 이제는 변화의 요구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또한 협동조합이 거대화 일반화되면서 그것이 갖고 있는 본래적 가치 또는 정신이 점점 희미해지고 결국 조합원 이기주의로 흐르고 있는 점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했다. 도대체 협동조합이 일반 기업에 비해 무엇이 다른지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나아가 협동조합운동이 조합원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현대사회가 공통적으로 맞닥뜨린 네 가지 과제, 즉 

첫째: 식량문제의 해결과 기아극복
둘째: 인간적이고 생산적인 일자리 문제 해결
셋째: 환경보전에 의한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한 노력
넷째: 지역사회 및 공동체에 대한 기여의 문제

이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으면 협동조합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3단게 협동조합운동이 출발하는 지점, 아니 3단계 협동조합을 전개하게 된 문제의식은 바로 레이드로 박사가 지적한 현 단계 인간의 보편적 과제에 대한 대응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다. 

몬드라곤은 레이드로 박사가 지적한 네가지 과제 가운데 특히 인간적이고 생산적인 일자리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협동조합운동의 새롭고 활기찬 시도로 평가되고 있다.

1980년 레이드로 박사가 문제 제기를 한 이후 약 15년 동안 협동조합운동가들은 토론과 논쟁을 계속 이어갔다. 이 토론의 결과는 1995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개최된 국제협동조합연맹 100주면 총회에서 "21세기 협동조합의 원칙"이라는 문건으로 정리되고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여기에는 "협동조합의 정의", "협동조합의 가치", "협동조합의 7대 원칙" 등이 실려 있다. 이로써 협동조합의 정체성에 대한 토론은 일단락 되었다. 


교육협동조합운동

만약 정부가 모든 어린이는 어느 기준에 맞게 교육받아야 한다고 요구하고, 제공되는 서비스에 대한 비용 지불을 동의한다면, 조합원기반 조직이 교육 서비스를 제공할 여지는 없을 것이다.  MOB(Member ownend Business)가 교육에 참여하는 데는 두가지 실질적인 이유가 있다. 


1) 조합원에게 교육훈련을 제공 하고 그들이 거버넌스에 참여할 능력을 부여하기 위함이다. 
  • 협동조합은 로치데일 원칙을 받아들이는데, 거기에는 교육이 포함되고 잉여의 일부를 그 목적으로 배정한다.
  • 비슷한 이유 때문에 개발도상국가 신용협동조합도 새로운 협동조합을 개발하는 것과 성인 문자해독 및 산수 프로그램을 연결시킨다. 그리고 이것은 잘되고 있다. 
2) 정부가 자원이 부족하거나 어린이에게 기본교육을 제공할 의지가 부족한 곳에서 MOB 가 개입한다. 

  • 농촌지역은 정부가 그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실패하고 MOB, 예를 들면 농업협동조합과 신용협동조합이 그 격차를 메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 예를 들어, 탄자니아에서는 커피 마케팅 협동조합이 초등학교를 운영해왔고, 중등학교에 가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런 일을 하는 것은 공공부문이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MOB 가 제공하는 것이 분명한 비교우위가 있어서 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자신들이할 수 있게 되기만 하면 바로 그 일을 인수해서 담당하는 경향이 있다. 
특정 상황에서, 협동조합은 조합원기반 교육을 제공하는 데 분명한 장점이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는 의료서비스와 비슷하다. 정부는 서비스를 직접 제공할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관리되는 시장을 서로 다른 유형의 교육제공자가 창출해야 한다. 충분한 자금을 제공하여 모두가 접근할 수 있는 공정하고 동등한 수준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제공자 사이에는 진정한 선택이 가능해야 하고, 그래야 협동조합이 조합원제도를 제공할 수 있다. 만약 서비스가 독점이라면 부모는 조합원이 되어야 하며 협동조합은 자원봉사를 그만두게 된다. 이것은 농촌지역이 아니라 도시지역에 해당되는데, 거기에는 인구가 충분히 많아서 하나 이상의 제공자가 지원된다. 만약 이 조건이 충족된다면 조합원소유 교육은 시작될 수 있다. 


사례1

사실, 단 한 나라만이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어 소비자소유 교육제공자로 등장했다. 스웨덴이었다. 여기서 어린이돌봄 협동조합은 1980년 초반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지방정부가 독점적 교육제공자에서 벗어나 부모에게 바우처를 주어, 부모가 독립 교육제공자 중에서 선택할 수 있도록 정책 결정을 내렸다. 협동조합개발에이전시 네트워크의 도움을 받아서, 약 1,300개의 부모소유 어린이 돌봄 협동조합이 설립되었다. 또 다른 129개는 그 다음으로 중요한 이해관계자 집단인 종업원들이 설립했다. 어린이 돌봄협동조합은 계속해서 인기를 끌었고 지방정부, 비영리조직, 그리고 영리 교육제공자보다 여러 가지 지표에서 우월했다. 특히 부모를 참여시키려고 장려하는 정도가 다른 유형보다 훨씬 더 크다.

협동조합 학교는 비슷한 방법으로 시작되었다. 1992년 스웨덴 정부가 의무교육기간인 7~16세 학생 그리고 고등학교 연령인 16~18세의 자녀가 있는 모든 부모에게 자녀의 학교를 선택할 수 있도록 일반권리를 제공했다. 동시에 각 학생에게 교육비를 제공하는 방법을 바꾸었다. 즉, 지역정부의 교육예산과 분리하여 부모에게 직접 교육비 바우처를 주었다.

스웨덴의 학부모들은 정부로부터 등록금 바우처를 지급받는다. 바우처란 등록금 증서 같은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것을 학교에 제출하면 등록금을 따로 낼 필요가 없다. 학교 입장에서는 이것이 바로 생명줄이 된다. 정부가 학교에 보장해주는 소액 예산 이상의 것은 학생으로부터 바우처를 받아서 정부에 제출해야만 확보가 가능하다.스웨덴이 1992년부터 이 제도를 시작한 이유는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공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학교와 교사들은 나태해질 대로 나태해져 있었고, 교육의 질은 낮았다. 교육의 질이 낮은 학교일수록 학생과 학부모의 외면을 받게 한다면 이런 현상은 상당히 줄어들 수 있다. 교육 소비자인 학생과 학부모에 의한 학교선택권이 필요해진 것이다.

 이 말은 부모들이 자녀를 사립학교에 보낼 수 있다는 의미이다. 또한 누구나 사립학교를 설립할 권리도 주어졌다. 이는 부모가 자신들의 학교를 세울수 있다는 말이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제한이 있다. 새로운 사립학교는 중앙정부의 승인을 받아야만 한다. 그리고 이 학교는 추가학비를 요구할 수 없고, 학업성적을 기준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이 부문은 1992년에 7~16세 의무교육학교 90개와 고등학교 57개를 시작으로 2005년에는 각각 585개 와 266개로 증가했다. 이는 7~16세 학교의 12%를 차지했고, 고등학교의 33%를 차지했다. 같은 시기동안, 사립교육기관과의 경쟁 아래서 지방공립학교의 수는 252개 줄었다. 2007년에 새로운 사립학교를 설립하겠다는 600개의 원서가 제출되었다. 추세는 더 큰 다양성과 독립성으로 향하고 있다. 새로운 학교는 영리기업, 비영리 혹은 협동조합으로 모두 운영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아무도(정부부처와 학교연합체마저도) 정확히 몇 개의 학교가 제대로 된 부모소유 협동조합인지를 아는 것 같지는 않다. 어느 선도적인 학자에 의하면, 스웨덴은 이제 역사적인 전환점에 이르렀는데, 여기서는 시민 참여가 더 큰 역할을 하고 제 3섹터가 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완전히 가능하게 되었다. 고령화하는 인구문제, 공공재정의 감축, 그리고 민주주의의 문제점 증가 등이 모두 분위기의 변화를 이끌어내었다. 협동조합은 더 이상 개인적 대안이 아니라 서비스 사용자가 조합원이 되어 자신이 받는 서비스를 통제하는 방법으로 받아들여진다.

스웨덴 청소년 들의 교육 여건은 서구국가 에서 그다지 뒤지지 않는다. 선 의무교육 기간인 유아원 부터 초등학교 9학년(우리나라중학교 3학년지 뿐만이 아니고  고등학교, 대학 그리고 대학원 박사과정 까지 교육비가 료이기 때문에 본인이 공부에 대한 진지한 열의와 관심만 있다면 얼마든지 학업에 열중할수 있다. 부모의 수입의 차이에 따라 생기는 가정간의 격차를 줄이고 어느학생 이나 똑같이 삶의 질을 보장 해주기 위해 정부 에서는 모든 아동에게 아동 수당을 지급 해주고 있으며, 학교 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에게는 학업 수당을 지급 해준다. 결과 적으로 학생 들간의 경제적 격차를 임으로써 사회의 계급적 차이와 부모의 수입과 관계없이 소외와 따돌림을 당하지 않게하는 효과를 가져다 준다.



사례 2


영국에서는 전국소비자협동조합인 코퍼러티브그룹과 협동조합칼리지가 현재의 공립학교를 협동조합학교로 전환시키는데 참여하고 있다. 현재까지 10개가 전환대상으로 선정되고, 약 100개는 아주 적극적으로 이 아이디어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스웨덴 학교와는 달리 이들은 다중이해관계자 협동조합(multi-stakeholder co-op)으로, 부모, 학생, 교직원, 그리고 지역사회가 모두 조합원이 되었다. 또한 이들은 덜 독립적이다. 왜냐하면 비록 이들이 교과과정과 교육정책에 대해서는 더 통제할 수 있지만, 지방정부 부문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으로 교육에서 협력을 바라보는 방법이 있다. 협동조합 학교뿐 아니라, 학교 협동조합, 학생소유협동조합이 학교 안에서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학생들에게 스스로 비즈니스를 하도록 권장하는 방법도 있다. 이런 것들은 스리랑카와 같은 개발도상국에서는 일반적인 사례이다. 영국 협동조합칼리지는 300개의 청년협동조합을 설립하도록 하여 청년들이 협동조합을 설립하여 공정무역 제품을 팔고 이 방법을 학교와 연계하도록 한다. 영국 협동조합칼리지는 또한 학교들과 함께 교과과정 교재 등을 개발하여 이를 통해서 학생들이 협동조합 비즈니스 방법을 더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이 모든것은 스웨덴에서 가능했던 것과 같은 순수한 부모소유 학교 와는 거리가 멀다. 공공부문의 정서가 지배적인 다른 서비스처럼 교육기관에서도 조합원제도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다중 이해관계자 관리는 생산자(학교의 경우는 교육자)와 정치인의 기득권에 대해 소비자가 지불해야 할 비용처럼 보인다. 

사례 3

교육협동조합 사례 

몬드라곤에서 처음에는 2년 과정이던 기술전문학교가 상급 과정으로 확대됨에 따라 등록 학생 수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그에 따라 재정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수업료를 인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는 결국 가난한 집안의 유능하고 야심있는 아이들이 교육을 받을 수 없게 되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학비를 부담할 능력이 있는 가정에만 교육 혜택이 돌아간다는 것은 협동조합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돈 호세 마리아는 조합원들이 또 하나의 사회조직을 고안하도록 이끌었다. 이것이 바로 조합원의 대부분이 기술전문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알레코프 학생협동조합이다. 처음에는 돈 호세 마리아가 지도하고 있던 교육문화동맹이 사기업체와 실습 계약을 맺고 학생들에게 시간제 직업을 갖도록 주선하여 교육비를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형태였는데, 알레코프가 만들어지면서 노동을 통해 학비를 조달하는 유형이 협동조합 복합체 내에 도입되었다.

알레코프는 1966년 설립 당시부터 오전과 오후에 각각 4시간씩 나누어 근무하는 2교대로 운영되었다. 학생들은 공장에서 하루에 4시간 일하고, 4시간 수업을 받았다. 이는 학교가 동일한 교육과정을 오전과 오후에 실시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알레코프는 다른 협동조합이 주문한 부속품들을 생산하는 일에서부터 출발했다. 이 일을 계속해가는 동안 다른 사기업체로부터도 점차 많은 주문을 받아냈다. 알레코프는 기술전문학교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학교와의 관계를 활용하여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과학 및 공학 교육에 쓰일 장비와 도구를 개발하기도 했다. 

지도자들은 알레코프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학생 조합원들을 회사 운영에 참여시키는 문제와 소수의 상근 경영진 및 기술자들의 이해관계와 경험을 존중함으로써 회사를 경제적으로 강화하는 문제를 서로 조화시켜야 했다. 또 알레코프와 제품 공급 계약을 맺고 있는 다른 협동조합들의 이익도 고려해야 했다. 그리하여 삼자가 참여하는 대표기구가 만들어졌다. 이사의 ⅓ 은 그 회사에 상근하는 참모진이  뽑고, ⅓ 은 학생 조합원들이, 나머지 ⅓ 은 계약을 맺고 있는 협동조합이 선출했다. 1984년 알레코프는 450명이 넘는 학생 조합원들에게 학비와 생계비를 벌 수 있는 일거리와 노동 경험, 그리고 협동조합의 운영 과정을 직접 겪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사례 4

연구협동조합 사례.



지금까지의 통설에 따르면, 노동자생산협동조합이 설령 민주적 경영에 따른 제반 문제를 해결하고 회사의 확장 및 불황에 대비한 자금을 비축하거나 조달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규모가 작고 개발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결국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여겨졌다. 또한 노동자생산협동조합이 최신 과학기술을 가지고 시작한다 해도, 다른 사기업체들이 기술과 제품을 현대화하기전까지만 경쟁력이 있을 뿐이라는 게 지배적인 생각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몬드라곤의 해결 방식은 공업협동조합을 지원하고 다시 공업협동조합의 지원을 받는 공업(응용) 기술협동조합을 만드는 것이었다.

공업기술연구협동조합인 이켈란은 기술전문학교에서 공장 운영에 관한 과목을 담당하던 교사 마뉴엘 케베도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1965년 케베도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공업기술 연구의 가능성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1966년 에는 이미 몇 가지 계획이 실행에 옮겨졌다. 초기의 연구목적은 협동조합의 기술과 생산 실태를 관찰하여, 이를 바탕으로 학교 교과과정을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몇 달 뒤 케베도는 범위를 넓혀서 협동조합의 효율 향상을 위한 연구를 포함시켰다. 1968년 이를 위한 연구 분과가 설립되고 케베도와 동료 교사 2명은 이 일을 전담하기 위해 학교교육 업무를 면제받았다. 

1968년 케베도를 포함한 교사 6명은 프랑스의 대학으로 공업기술에 관한 공부를 하러 가기 위해 6개월간 휴가를 얻었다. 그들이 파리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학생 시위로 인해 대학들이 일시적으로 마비되었을 때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파리의 연구실에서 어떤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책을 읽어쏙, 나중에는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다른 나라도 방문했다. 그들의 목적은 외국의 공업기술 관련 연구 현황 및 주도적인 연구단체의 조직, 운영 현황을 배우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케베도는 학교에 자동화 연구실을 서립하자고 제안했다. 교장인 하비에르 레테기는 학교에 그럴 만한 자금이 없다고 대답했지만, 케베도는 성인교육과정에서 과외 지도로 번 돈을 학교에 기부했다. 1972년 자동화 연구실은 협동조합들과 계약을 맺고 작업을 시작했다.

1974년 돈 호세 마리아는 모드라곤이 한층 야심적인 공업기술 연구 계획을 마련할 준비가 되었다고 선언하여 학교에 있는 그의 가까운 동료들조차 놀라게 만들었다. 1차로 약 1억 1,200만 퍼세타(75만 달러)가 몇 개의 사무실과 실습실, 그리고 한 개의 기계작업장을 갖춘 새 건물을 짓는 데 투자되었다. 이 투자는 협동조합 복합체로서는 매우 큰 부담이었다. 울고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인 헤수스 라라냐가는 "우리는 돈 호세 마리아의 다른 제안과 마찬가지로 이 제안에도 반대해{ㅆ습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우리를 수긍하게 만들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1974년 노동인민금고를 비롯하여 공업기술연구협동조합의 지도자들이 모였다. 노동인민금고와 많은 협동조합이 돈 호세 마리아의 제안을 받아들여 연구소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이켈란은 1977년 초에 새 건물로 옮겼다. 

MCC 체제 출범 직전인 1990년 1년 동안 이켈란은 설계와 제작기술, 정보화기술, 에너지 절감 기술 분야에서 국내 프로젝트 약 60건, 국제 연구 프로젝트 50여 건을 수행했다. 이에 대한 연구 예산은 모두 500만 유로였다. 연구 예산은 1998년 900만 유로, 2002년 1,400만 유로, 2006년 1,800만 유로, 2010년에는 약 2,000만 유로로 증가했다. 현재 이켈란에는 260 여 명의 연구자들이 일을 하고 있다. 물론 이들은 조합원으로서 이켈란의 경영에도 참여하고 있다. 

1986년 기계공구협동조합 데바코 그룹의 기술 혁신을 위해 이데코가 설립되었다. 이데코는 주로 공작용 기계 분야의 기술을 연구했는데, 1990년에 들어 각종 구조설계, 수치제어, 인공지능, 센서 연구, 나아가 로봇 연구로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이데코의 연구 예산은 1998년 약 300만 유로, 202년 약 500만 유로, 2010년 약 800만 유로로 늘어났다. 연구원들은 100여 명으로 증가했다. 

1995년 자동차 부품 분야의 기술 혁신을 위해 "마이어 테크놀로지"가 설립된 이후 2000년대에 들어서는 몬드라곤의 각 제조업 분야에서 기술연구소들을 따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2000년 자동화 모듈에 관한 기술 분야의 "모두테크", 2002년 경영 연구 분야의 "미크"가 설립되었다.

기술연구소의 설립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된 해는 2003년이다. 이해에 스페인 경제는 다소 침체된 국면으로 접어들었는데, 이에 대응하여 몬드라곤 제조업 부문의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는 기술연구소 설립으로 이어졌다. 파고르 전자의 기술 개발을 위해 만들어진 "아오테크", 기계 제작 분야의 "코니커", 디자인과 비파괴 실험기술 분야의 "로르테크", 리프트 엘리베이트 기술 분야의 "오로나", 도로포장 분야의 "울마 PTC", 자동차 부품 신소재 분야의 "에더테크" 등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산학 공도연구 방식의 전형을 만들어낸 "가라이아 혁신 공원"이 설립되었다. 여기에서는 주로 건설 분야의 기술 연구가 진행되었다.

또한 2005년 파고르 가전에서 전자, 통신, 디자인, 진동융합기술 연구를 주로 하는 "홈테크", 2007년 선진적인 기업 비즈니스 서비스 기술을 연구하는 "잇아", 2008년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와  공동으로 가정용품 분야의 내장기술 연구를 주로 하는 "에틱 마이크로소프트"가 설립되었다. 2009년에는 가정 절전 시스템 기술을 연구하는 "CS 센트로"가 설립되었다. 

2010년 현재 이 모든 기술연구소의 연구 예산은 총 5,900만 유로에 이르고, 연구자 수는 780명을 넘어섰다. 앞으로 기술 연구 분야는 계속 확대되고 더욱 세분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기술 연구 분야에서도 협동조합의 정체성에 관련된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1990년대까지 설립된 이켈란, 이데코, 마이어 테크놀로지는 모두 협동조합 방식으로 운영되는 기술연구소이다. 이곳의 연구원들은 연구 시간을 쪼개 연구소의 이사회에 참여하고 경영자들을 선출하며, 연간 경영계획 및 중장기 발전 전략 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것ㅇㄴ 공학도인 연구원들에게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이 역시 조합원으로서 그들이 짊어져야 할 의무였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설립된 기술연구소들은 대부분 제조업협동조합의 자회사이거나 몇 개 협동조합 기업의 합작회사 형태로 만들어졌고 연구원 대부분은 비조합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최신 첨단 분야의 기술 연구를 위해 스카우트한 고급 연구자들은 협동조합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경우가 ㅁ낳다. 최근 설립되어 운영의 초기 단계에 있는 대부분의 기술연구소들에서 협동조합 문화가 정착되기 까지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몬드라곤의 진화 과정에서 이 부분도 앞으로 눈여겨볼 대목이다.


1). 이켈란의 자금 조달과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

  초기에 이켈란은 전적으로 몬드라곤 협동조합의 지원에 의지했지만, 1982년부터는 바스크 지방정부가 이켈란 예산의 절반을 기부하기 시작했다. 1984년 에는 연구프로젝트 계약을 맺은 회사들이 에산의 38%를 지불했다. 계약을 맺은 곳은 대부분 협동조합이었지만, 정부 지원을 받은 이후 사기업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여 1984년에는 두 개의 사기업과 프로젝트 게약을 맺었다. 예산의 나머지 12%는 매년 각 지원조직의 회원들이 납부하는 1인당 2600페세타(17.80$)의 연회비로 충당되었다.

이켈란은 회원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 회비 액수를 가능한 한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회원 협동조합들과 사기업들과 사기업들은 이켈란이나 그 외의 연구소에서 개발된 새로운 기술이나 제조 방법을 소개하는 회보를 매달 받아 볼 수 있다. 이켈란의 모든 조합원은 기술에 대한 아이디어를 그 지도자들에게 알려야 한다. 이런 방법으로 회원사들은 최신의 기술 정보를 모두 받게 된다.

이켈란의 회원이 아닌 협동조합과 사기업은 같은 계약에 대해 회원들보다 50%를 더 지불해야 한다. 50%를 추가로 지불하는 사기업은 연구 겨로가에 대해 2년 동안 독점권을 갖는다. 만약 그 회사가 독점권을 영원히 보유하기를 원하면 이켈란에 100%의 할증금을 내야 한다.

이켈란의 직원들은 가끔 그들이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지 못하는 주제에 대해서도 계약을 맺는다. 만약 그 주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이켈란과 연구를 발준한 회사는 연구비용을 50:50 으로 공동부담한다. 이켈란이 부담하는 절반은 학습비용의 일부로 간주된다. 이런 방침은 회사들이 모험적인 연구에도 투자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정부 기부금은 이켈란의 일반 자금으로 사용되는 보조금이 아니다. 그것은 공학, 물리학, 에너지, 관련 전공의 우수한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지급된다. 해마다 이켈란과 바스크 지역에 있는 다른 두 사립 연구기관에 주는 연구비는 공식적으로 발표된다. 

이켈란에서 학비를 지원받는 자로 선정된 이들은 박사학위 논문에 필요한 기초연구를 하면서 교육실습생으로 8개월 또는 2년 동안 일한다. 프로젝트의 내용과 재정상의 문제가 없으면 이들 가운에 몇 사람은 이켈란의 직원으로 채용된다.

이켈란의 재정 정책은 협동조합의 조합원들과 지역사회에 봉사해야 한다는 몬드라곤 설립자들의 이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 정신에 따라 이켈란은 협동조합과 동일한 기준으로 사기업체에도 회원 자격과 게약 권리를 부여한다. 바스크 지방정부가 생겨나기 전에도 케베도는 바스크의 다른 두 연구기관 지도자들에게 정부 지원을 함께 얻어내자고 제안했다. 그들은 바스크 지역의 응용기술 연구 능력을 향상시키려면 연구비 지원이 불가피하다고 정부 관리들을 설득했다.

바스크 정부는 해마다 100~120명의 외국 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제공했다. 이켈란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도 프랑스 툴루즈대학의 박사과정 또는 그 밖의 곳에서 수준 높은 연구에 필요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 


2). 운영체계와 노동조직

이켈란은 2차 협동조합으로, 그 조합의 이익은 지원조직 조합원들의 이익과 균형을 이루어야 했다. 이켈란의 직원들은 85명으로 구성된 총회의 40% 가량을 차지하고, 기원 협동조합들은 조합원 300명당 대표 1명을 파견하여 현재 30%를 차지하고 있다. 다른 2차 협동조합(학교와 노동인민금고)의 대표 역시 조합원 300명당 1명으로 총회 대의원을 구성하지만, 30%를 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잇다. 12명으로 구성된 이켈란의 이사회는 이켈란 직원 4명, 공업협동조합 대표 6명, 2차 협동조합의 대표 2명으로 이루어진다. 선거는 2년마다 실시되고 대표의 임기는 4년이다.

1984년 말 당시 이켈란에는 90명의 조합원이 있었는데, 54명은 상근 직원이고, 13명은 연구원, 19명은 학생, 4명은 반나절만 일하는 기술전문학교 교수였다. 연구 분야는 극소전자공학, 기계공학, 컴퓨터공학, 로봇공학 등 네개로 나뉘어 있었다.

이켈란의 조직은 고도로 분권화되어 있다. 몇 개의 연구과제를 맡는 책임자와 그 밑에서 일하는 조수들을 두는 대신, 모든 상근 직원은 연구과제를 두 개씩 맡아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진다.

협동조합이나 사기업체의 의뢰를 받는 경우에는 고객 회사에 소속된 1명또는 그 이상의 직원과 이켈란의 직원들로 구성된 협동연구조를 편성한다. 이러한 편성 계획은 협동조합과 연구조직의 정보 교환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신기술 개발과 도입을 용이하게 해준다. 케베도에  따르면, 고객 회사에 공업기술 연구 직원이 있을 때 연구사업은 더욱 효율적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생산방법의 개선에 관한 연구는 협동조합이 맡고, 이켈란은 좀 더 진보된 기술에 전념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형태이다. 계약에 따라 위임된 연구과제와 이켈란 직원들이 자체적으로 수립한 연구ㅗ가제를 대등한 비율로 나누는 것이 이켈란의 정책이다. 이켈란의 조합원들은 각각 한 가지씩 연구과제를 관리하고 있다.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이켈란은 스페인에서 주도적인 산업연구기관 중 하나로 명성을 얻었고 국제적 관심도 많이 받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여기서 또다시 돈 호세 마리아와 그가 설립했던 학교의 중요성을 확인하게 된다. 공업기술연구기관을 설립할 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높은 학위를 지닌 사람을 최고 간부로 채용한다. 그러나 몬드라곤의 지도자들은 몬드라곤에서 으레 그렇게 해왓듯이 사회적 명성이나 학위에 구애받지 않고, 디도록 몬드라곤 자체 내에서 사람을 뽑아 조직을 구성했다. 케베도에게 높은 학위가 없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케베도가 새로운 임무를 맡을 때마다 자신과 함께 작업할 모임을 만들어 그것에 대처해 왔음을 알았고, 책임이 더 커짐에 따라 그가 계속 발전하리라 기대했다. 

케베도와 조합원들은 당장 해야 할 일에 집중하면서도 미래에 대한 전략을 세우고 이켈란을 발전시켰다. 이 점은 특히 그들이 바스크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얻어낸 방식에서 잘 드러난다. 그들은 정부가 출범하기 몇 달 전부터 일을 시작했으며, 나아가 다른 두 연구기관과 연합하여 이켈란이 몬드라곤에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바스크 지역 전체의 사회와 경제, 그리고 산업 부문의 발전에 기여할 거임을 밝혔다. 더욱이 이켈란은 당면한 일시적 상황만 고려해서 진로를 결정하지 않았다. 이켈란의 지도자들은 다른 연구기관에 대해 공부하고 그들 스스로의 경험을 꾸준히 부넛ㄱ한 것을 토대로 조직 발전을 위한 체계적인 전략을 계속 가다듬었던 것이다. 

사례 5

몬드라곤 대학교





MCC 체제의 출범 이전부터 이미 몬드라곤이 운영하던 교육기관들은 매우 다양하고 활동적이었다. 호세 마리아 신부는 1941년 이 지역에 부임하자 마자 기술전문학교를 만들었고, 이 학교 졸업생들을 모아 몬드라곤의 토대를 쌓는 데 성공했다. 그가 교육에 쏟아부은 열정은 정말 대단했다. 몬드라곤의 모든 교육기관에 표어로 붙어 있는 호세 마리아 신부의 다음 글귀를 음미해 보라 "삶의 표현은 그저 살아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고 적응해간다는 것이다. 이 학교에서 몬드라곤의 제조업 부문에 필요한 노동자 조합원들이 매년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회사의 협동조합 문화에 잘 적응했으며, 기술 수준 또한 높았다. 기술전문학교뿐 아니라 경영 분야의 교육에서도 큰 진전이 있었다. 오냐티 지역에 세워진 "에테오" 에는 마케팅, 경영행정, 기업 관리 등의 전문가 코스가 개설되었다. 또한 외국의 대학교나 스페인의 타 지역 대학들과 연계를 맺어 에테오 졸업생들을 공부시키는 프로그램도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를 전문적으로 관리하고 진행하는 "고이에르" 라는 이름의 교육 컨설팅 기관도 만들어졌다.

MCC 체제가 출범하고 7년이 흐른 1998년, 몬드라곤은 자신들이 세운 대학교를 갖게 되었다. 이것은 몬드라곤의 연구-교육 부문에서 이루어진 가장 커다란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설립 첫해 몬드라곤 대학에 총 2,400여 명의 학생들이 등록했다. 교육과정으로는 3년 코스의 1단계 과정과 4년 코스의 2단계 과정을 두었다. 그리고 이 과정을 마친 학생들을 위한 3단계 과정, 즉 대학원 과정을 개설했다. 대학원 과정에는 200여 명이 등록했다. 대학의 1년 예산 규모는 1,400만 유로 정도였다. 

몬드라곤 대학은 교육협동조합으로 운영된다. 주로 MCC 의 기금을 투자받아 운영되지만, 대학의 이사진은  MCC 경영진뿐 아니라 교직원들로 공동구성된다. 

1998년 설립 당시 교육과정은 엔지니어링학부, 경영학부, 인문학부 세 가지로 짜여졌다. 엔지니어링학부는 1단계 과정으로 기계, 컴퓨터, 전자 제조, 산업디자인과 등이 있었고, 2단계 과정으로 산업조직, 자동화, 전자산업과가 있었다. 3단계(대학원) 과정에는 산업조직 학위과정, 엔지니어링 학위과정, 자동화 학위과정이 있었다. 경영학부는 1단계 과정으로 컴퓨터 엔지니어링, 기업행정, 경영학과가 있었고, 2단계 과정으로 기업행정과 경영학과가 있었다. 인문학부에는 1단계 과정으로 유아교육, 특수교육, 영문학과가 있었고, 2단계 과정으로 기업인간학과가 있었는데, 대학원 과정도 이와 동일했다. 몬드라곤대학의 교육과 관련하여 한 가지 특징적인 것은 강의의 약 60%가 스페인어가 아닌 바스크어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몬드라곤대학은 설립 이후 꾸준히 학생 수가 증가하고 학과도 다양해졌으며, 산학협동의 기술 연구 과제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졸업 이후 조합에 가입하는 것이 의무 사항은 아니지만, 대학 졸업자 중 절반가량은 몬드라곤의 노동자 조합원이 되었다.

2000년 들어 몬드라곤 대학에는 교육심리학과와 통시엔지닝링과가 신설되었다. 그리고 대학원 과정에는 기업경영, 인터넷 환경 시스템, 인터넷 환경 개발, 기업 컴퓨터 시스템 등 4개 학과가 신설되었다. 2001년에는 금융경영, 환경 경영, 웹 어플리케이션 분석, 정보기술 교육, 교육센터 경영, 전략경영 과정 등이 추가되었다. 2002년에는 총 23개의 대학원 수강 과목이 개설되었고, 기업 연구소들과의 공동연구도 매우 활발히 진행되었다. 2003년 몬드라곤대학의 학생 수는 3,500여 명으로 늘어났다. 특히 매년 학부 과정의 학생 수보다 대학원 과정의 학생 수가 훨씬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2008 ~ 2010년까지 3년간 몬드라곤대학은 국제적인 수준의 대학으로 발전하기 위한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엔지니어링 분야의 6개 과정에 대해 프랑스 대학들과 공동학위를 수여한 것이다. 대학원 과정의 수료생들은 417명이었으며, 120명이 박사학위 과정을 밟았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부분은 2006년 MCC 체제에서 몬드라곤 체제로 전환되면서 몬드라곤대학이 각종 직업교육기관들을 통합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기관들은 이전에 대학과는 별도로 독립적으로 운영되었지만, 2006년 이후 몬드라곤대학의 비즈니스학부, 인문 및 교육학부, 몬드라곤 기술학부로 편재되어 통합 운영되고 있다. 

몬드라곤대학에 속해 있지 않은 교육기관에는 기푸스코아 지역의 유치원 네트워크인 "아리스멘디", 은퇴자 기술교육기관 "레아-알티바이", 그리고 협동조합 경영교육기관 "오타롤라"만 남아있다.

아리스멘디는 2000년대 초반부터 몬드라곤이 심혈을 기울여 인수하고 협동조합 방식으로 전환시킨 대표적인 유아교육기관이다. MCC 는 이 기관의 인수와 협동조합 전환에 무려 7~8년간 공을 들였다. 기푸스코아 지역 어린이들의 약 2/3를 포괄하는 이 유치원 네트워크는 그곳에서 일하는 교직원과 학부모들이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른바 우리나라의 공동육아협동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사례 6

협동조합 경영교육기관 오타롤라





몬드라곤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는 점이 있는 연구자나 활동가가 몬드라곤을 방문하면 대부분 오타롤라로 먼저 안내된다. 오타롤라는 MCC 체제가 출범하고 3년이 지난 1994년에 설립되었다. 주요 임무는 몬드라곤 각 부문 및 개별협동조합의 이사진과 조합평의회 간부들에게 협동조합 경여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이다. 1998년 이들을 위해 6개 교육과정이 운영되었고, 약 220여 명이 이 과정을 이수했다. 물론 일반 조합원들이 참여할 수 있는 각종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한다. 그리고 월간 잡니 "TU Lankide"를 발행하고 있다. 이 잡지는 몬드라곤이 설립 초기에 발행했던 "노동과 단결"의 맥을 잇고 있다. 발행 부수는 매월 1만 부 정도이다.

스페인이나 외국의 연구자와 경영자가 참여할 수 있는 짧은 연수 프로그램도 있다. 1998년 한 해 동안 세계 각구에서 800여 명의 방문자들이 오타롤라를 찾고 몬드라곤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오타롤라에서 진행되는 교육에서는 몬드라곤의 현직 부서장들이 강의를 맡기도 한다. 오타롤라는 스페인이나 외국 대학들과의 교류도 매우 활성화 되어 있다. 1999년에는 몬드라곤대학과 연계된 "혁신 경영 과정"이 새롭게 개설되었고, 유통 부문과 기업 서비스 분야에 초점을 맞춘 교육과정도 마련되었다. 이외에 몬드라곤대학을 졸업한 대학원생들을 위해 협동조합 경영 과정도 개설되었다. 이해에만 약 1,000명의 해외 방문객들이 몬드라곤에 대한 소개 교육에 참여했다. 

2002년 몬드라곤대학 내에 오타롤라가 운영하는 "선진 지도자 과정"과 여러 종류의 전문가 과정을 상시적으로 개설한 "모네"가 설립되었다. 여기에는 몬드라곤대학과 MCC 가 공동으로 투자했다. 교육과정으로는 마드리드 농업 협동조합 지도자 과정, 오냐티 지역민을 위한 MBA 과정, 은행 업무와 주식거래인 과정이 개설되었다. 

2002년부터는 지도자 과정 안에 "대화기술 개발 프로그램"이 추가되었는데, 협동조합 경영자들에게 매우 인기 높은 교육과정으로 자리를 잡았다. 2003년에는 협동조합별 맞춤 지도자 과정이 개설되기도 했다. 에로스키 경영자를 위한 과정, 파고르 경영자를 위한 과정, 노동인민금고 경영자를 위한 과정 등이 그것이다. 2005년 해외에서 몬드라곤을 찾아오는 방문객 수는 2,000명을 넘기 시작했다. 오타롤라는 이들을 위해 2~5일 과정의 소개 교육 프록램뿐만 아니라 각종 세미나와 교육과정을 다양하게 마련했다. 2007년부터는 방문객 수가 4,000여 명에 육박했다. 

몬드라곤의 경영자들을 위한 협동조합 경영교육과정은 매우 적극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교육을 받는 사람들 중에는 전문 경영자도 있지만 평조합원 출신의 이사와 조합평의회의 간부도 여럿 있다. 이들은 오타롤라의 경영교육과정을 이수한 뒤 현장에 돌아와 경영에 참여하는 과정을 통해 회사의 구조와 발전 전략에 대해 높은 수준의 이해도를 유지하게 된다. 또한 이 과정을 통해 어떻게 협동조합의 정체성을 지켜낼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된다. 몬드라곤이 꾸준히 발전해나갈 수 있었던 요인으로 여러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이러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협동조합에 대한 경영교육을 빼놓을 수 없다.